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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화 소설가
정정화 소설가

내가 활동하고 있는 울산 소설가협회에서 오랜만에 문학 기행을 갔다. 들른 곳 중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코스는 통영에 있는 박경리 기념관과 묘소였다. 그곳에는 선생의 발자취와 작품, 어록, 자필 원고 등이 전시돼 있었다. 자작시도 몇 편 전시돼 있었는데 그 중 '어머니'라는 시가 발길을 붙들었다.

 '어머니 생전에 불효막심했던 나를/ 사별 후 삼십여 년/ 꿈속에서 어머니를 찾아 헤매었다.// 고향 옛집을 찾아가기도 하고/ 서울 살았을 때의 동네를 찾아가기도 하고/ 피난 가서 하룻밤을 묵었던/ 관악산 절간을 찾아가기도 하고/ 어떤 때는 전혀 알지 못한 곳을/ 애타게 찾아 헤매기도 했다.// 언제나 그 꿈길은/ 황량하고 삭막하고 아득했다./ 그러나 한 번도 어머니를 만난 적이 없다.// 꿈에서 깨면/ 아아 어머니는 돌아가셨지/ 그 사실이 얼마나 절실한지/ 마치 생살 찢겨나가는 듯했다.// 불효막심했던 나의 회한/ 불효막심의 형벌로서 이렇게 나를 놓아주지 않고/ 꿈을 꾸게 하나 보다'

 돌아가신 어머니에 대한 회한과 그리움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시다. 환후 중이신 어머니를 둔 나는 한참 이 시를 들여다봤다. 가까이 있을 때 더 많이 안아드리고, 말 한마디라도 따뜻하게 해야겠다는 생각과 함께.
 선생께서 친필로 쓴 창작과정이나 작품을 볼 때면 왠지 가슴이 뛰었다. 원고지에 써 내려간 길고 긴 인내의 시간이 느껴져서다. 요즘 저렇게 자필로 원고를 써야 한다면 나는 얼마나 써낼 수 있을까? 만만치 않은 작업임이 틀림없었다. 함께 간 문우들에게 이렇게 원고지에 써야 한다면 소설 쓰겠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작업 환경이 좋아졌음에도 앓는 소리를 하는 내게 엄살떨지 말라는 듯 선생의 필체에는 힘이 있었다.  군데군데 놓인 선생의 주옥같은 말씀들이 가슴에 와닿았다. 파편적으로 흩어진 것을 모아 어록집을 한 권 만들면 글 쓰다가 힘들 때 들여다보면 좋을 것 같았다.

 "재탕은 예술이 아닙니다. 자기 자신의 마음으로 자기 자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정직하게 사물을 보세요."
 "작가는 시작이 아닙니다. 결과지요, 아니 아닙니다. 작가에게는 결과도 없습니다. 인생 자체에 결과가 있기 때문입니다. 오직 죽음이 있을 뿐."
 "작가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업입니다. 작은 기쁨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슬픔을 사랑하세요. 슬픔을 사랑해야 합니다. 있는 대로 견디어야 합니다."

 배울 만한 문구들을 핸드폰 카메라에 담았지만, 전부 담을 수 없는 것이 아쉬웠다. 내부를 둘러보고 나오니 기념관 앞마당에 보라색 수국이 우리를 반겼다. 산수국이라고 했다. 그 모양이 단아하고 아름답기가 여타 수국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선생의 동상 앞에서 단체 사진을 찍었다. 동상은 실물보다 작게 만들어져 아쉬웠다. 그래도 선생을 만난 듯 반가웠다.

 학예사에게 선생의 묘소에 대해 물으니 10분 정도만 올라가면 볼 수 있으니까 꼭 가보라고 했다. 우리 일행은 묘소를 향해 출발했다. 계단 초입을 들어서니 잎이 무성한, 큰 나무들이 터널이 되어 있었다. 선생을 만나러 가는 길이 소설 속 한 장면처럼 느껴졌다. 계단이 끝나고 오른쪽으로 난 흙길을 따라 걸었다. 마침 산 위로 안개가 끼어 몽환적인 분위기를 풍겼다. 산 중턱까지 내려앉은 안개는 고즈넉한 분위기를 더욱 고조시켰다. 안개는 소설 속 이야기를 뭉게뭉게 피워 올리는 듯 서서히 움직였다.

 왼쪽으로는 색색의 여름 코스모스, 오른쪽으로는 황금빛 해바라기가 펼쳐진 계단을 따라 올라갔다. 꽃밭 가운데로 난 계단을 걸으니 기분이 우쭐해졌다. 숨이 가쁘다고 느낄 즈음에 언덕배기에 올라섰다. 조금 더 걸어 올라가니 선생의 묘소가 있었다. 멀리 앞쪽으로는 아담한 산이, 사선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니 통영 바다가 내려다보였다. 울창한 수목에 둘러싸인 묘소는 깔끔하게 단장돼 있었다. 봉긋한 봉분이 선생의 온화한 인품을 말해주듯 곡선으로 휘어진다. 화려한 비석은 없었다. "내 무덤 앞에 비(婢)ㅅ돌을 세우지 말라"라고 노래한 H 시인이 생각났다. 제단 위에는 누군가 풀꽃을 올려놓았다. 소박하지만 하늘과 산과 바다를 품은 넉넉한 묘지였다. 일행과 잠깐 묵념을 했다. 글을 쓰던 손으로, 풀을 매던 손으로 나를 가만히 안아주시는 느낌이었다.

 집을 떠나오기 전, 정형외과 의사가 골절된 뼈가 덜 붙었다고 해서 망설이다 따라나선 여행이었다. 약간 절면서 걸어야 했지만, 마음은 한없이 풍요로워지는 시간이었다. 특히, 박경리 선생과의 정신적 조우는 작가의 길을 걷는 내게 큰 감흥을 주었다. 엄살떠는 내게 죽비 한 대 내려치시는 듯한 시간. 나는 툭툭 털며 다시 글 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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