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병훈 수필가
오병훈 수필가

신문이 없는 아침은 얼마나 아쉽고 허전할까. 이른 아침 잠을 깨면 맨 먼저 현관문을 열고 신문을 집어 들게 된다. 잉크 냄새가 신선하다. 하루를 신문과 함께 시작하는 일이 이제는 습관처럼 되고 말았다. 신문을 펼치면 세상의 온갖 정보들이 아우성이다. 때로는 우리가 잊고 있던 문화 교양 기사가 정신의 양식이 되기도 한다. 어떤 이는 아직도 종이 신문을 읽느냐고 하면서 세상의 모든 정보를 인터넷 신문으로 읽을 수 있다고 한다. 그렇지만 종이신문도 좋은 점이 있다. 기사를 한눈에 보고 마음대로 고를 수 있다는 점이다. 숨어 있는 기사를 찾는 일보다 전체를 한 눈에 보고 고르는 일이 더 쉽지 않겠는가.
 공기 속에 살고 있으면서 산소의 고마움을 잊고 살아가듯이 늘 우리 곁에 있는 신문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할 때가 있다. 

 개화기 정보가 어두웠던 때 신문을 창간하여 세상을 소통하게 한 선각자가 있었다. 그가 바로 영국인 베델(Bethell 裵說)이다. 대한제국 시절인 1904년 '런던 데일리 뉴스'의 특파원으로 러일전쟁을 취재하기 위해 경성에 온 그는 당시 조선이 처한 현실과 불확실한 미래에 동정심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가난한 나라의 국민들에게는 바르고 빠른 정보가 대단히 중요하다고 생각했으리라. 신문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중 양기탁을 만나 6월 29일 가편집을 해 보고 7월 18일 '대한매일신보' 창간호를 발행했다. 타블로이드판에 한글 2면 영문 4면 규모였다. 내용은 조선인의 자주독립 사상의 고취와 계몽에 대한 정보를 담았다. 이듬해 경영난으로 잠시 휴간했다가 8월 혁신호를 내면서 국한문판과 영문으로 완전 분리해서 펴냈다. 1907년에는 순 한글판 신문을 새로 창간하면서 국한문판, 영문판 세 가지 신문을 동시에 발간하게 되었다. 

 대한매일신보는 한글 신문이기 때문에 일반 백성들이나 부녀자들도 읽을 수 있어 교육과 계몽정신을 확산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일본의 조선 침략이 본격화되면서 신문도 탄압을 받기 시작했다. 발행겸 편집인이 영국인으로 돼 있어 검열을 피할 수 있었으나 일본의 간섭이 심해지면서 탄압도 가속화 했다. 1908년에는 발행인 베델이 일본 법정에 회부돼 금고형을 받기도 했다. 이 때의 중요기사나 논설은 양기탁이 썼고 베델이 영문으로 번역 게재했다. 주요 필진으로는 박은식이 주필이었고 신채호 최익 장달선 황의선 등 당대의 쟁쟁한 지식인들이 지면을 장식했다. 조선인의 독립정신을 일깨우는데 크게 기여했으며 국채보상운동을 펴는 등 애국운동을 이끌었다. 그야말로 우리말과 글로 겨레의 목소리를 신속하게 전해 민족의 자주독립정신을 키워나갔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만하다. 여성들의 개화와 사회참여에 공헌했고 우리말 보급에도 큰 역할을 담당했다. 

삽화. ⓒ왕생이

 예나 지금이나 언론의 역할이 얼마나 지대한가. 훗날 삼일만세운동에 수많은 조선인이 참여하게 된 것도 대한매일신보의 역할과 무관하지 않다. 신속하고 정확한 도도를 통해 많은 독자를 확보할 수 있었다. 당시 조선에 주둔한 일본군과 싸우는 전국의 의병들에 대한 활약도 사실에 바탕을 두고 정확하게 국내외에 보도했다. 이에 조선인들은 용기를 얻었으며 큰 위안을 받았다.

 통감부의 초대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대한매일신보에 대한 협박과 회유를 거듭하다가 매수 작업을 벌이기도 했다. 나중에는 신문지법을 만들어 국내에서 외국인이 발행하는 신문의 발행과 판매를 금지할 수 있는 법적 근거를 마련했다. 통감부는 대한매일신보의 기사가 정부와 국민을 원수로 만든다며 영국 총영사 코크번(Cockbarn)에게 베델의 처벌을 요구했다. 주한 영국총영사관에서 열린 공판에서 베델은 양기탁이 논설을 썼다고 했으나 판사는 경범죄에 해당한다고 선고했다. 후에 통감부는 양기탁을 국채보상 의연금 횡령혐의로 구속했다. 양기탁은 5차례나 공판을 받았으나 증거 불충분으로 무죄판결을 받았다.

 그러는 사이 일본의 압력으로 베델이 발행인을 사임하고 그의 비서였던 영국인 만험(Marnham)이 사장에 취임하였으나 판권을 이장훈에게 넘겨주고 조선을 떠났다. 양기탁도 손을 떼자 통감부는 신문을 완전히 손아귀에 넣고 마음대로 조정하게 되었다. 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부터는 대한매일신보에서 '대한'을 없애고 '매일신보'로 제호를 변경하여 총독부 기관지가 되고 말았다. 
 개화기에 민족의 눈과 귀가 되었고 입이 돼 준 신문은 그렇게 하여 점점 멀어져 갔다. 100여 년 전 오늘이 바로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한 역사적인 날이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