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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련 동화작가
장세련 동화작가

아버지의 위상이 예전 같지 않은 시대다. 아버지라는 이름만 생각해도 오금이 저렸던 시절이 있었다. 엄부자모(嚴父慈母)라는 말이 당연시됐던 시대의 이야기다. 굳이 호통을 치지 않아도 아버지의 말에는 가족 중 누구도 선뜻 반론을 제기할 수 없었다. 그랬던 만큼 아버지의 책임감도 컸다.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는 것은 오로지 아버지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헛기침 한 번으로 집안의 시끄럽거나 번다한 일들까지 아우르기도 했다. 자잘한 가정사에는 무심한 듯 아버지는 사랑방을 지켰고 손님들을 맞이했다. 웬만한 일에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던 아버지. 단 한 번 아버지의 눈물을 보았다. 70대의 상처(喪妻)가 얼마나 난감했을지 아버지의 눈물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50여 년 전까지만 해도 아버지의 모습은 비슷했다. 그랬던 아버지가 시대의 변천과 함께 사라졌다. 위상이나 든든함의 표상인 아버지보다는 친근하고 자상한 아빠를 요구한다. 굳이 아버지가 가장일 필요가 없어진 까닭이다. 그럼에도 아버지라는 이름만으로도 듬직한 등과 넓은 가슴을 생각하게 된다. 아버지의 그늘이 얼마나 크고 넓고 아늑했는지를 떠올리면 고단한 마음에 저절로 찾아드는 것, 안식이다. 숯마을 숯할아버지(윤미경/다림)를 읽으면서 더욱 그랬다. 더불어 찾아든 고마움과 그리움이 이 책을 오래 가슴에 품게 한다. 그만큼 울림이 깊은 책이다.

숯할아버지가 숯을 만드는 정성은 거룩하다. 마치 신에게 바치는 제례를 행하듯 몸놀림과 마음가짐이 반듯하다. 화력이 좋은 숯을 만드는 데 들이는 정성을 알고 나니 한 조각의 숯도 허투루 여기지 못할 것 같다. 잘 여문 참나무를 골라서 자르는 데서부터 숯만들기는 시작된다. 입구가 좁은 가마 안으로 무거운 참나무를 하나하나 손수 옮기는 과정은 힘겨우면서도 진지하다. 진흙으로 가마 문을 꼼꼼히 닫는 일도 잊지 않는다. 그러고도 꼬박 일곱 밤, 일곱 낮이 지난 뒤에야 완성되는 것이 참숯이다. 잘 구워진 숯을 꺼내는 일은 어쩌면 가장 견디기 힘든 과정인 것 같다. 1,300도가 넘는 숯가마에서 벌건 불덩이를 꺼내는 동안 온몸이 녹아내릴 것만 같은 뜨거움을 견뎌야 한다. 그런 다음 뜨거운 기운이 쉽사리 날아가지 않도록 모래로 덮어 천천히 식히는 것도 만만찮은 일이다. 

많은 사람들은 참숯을 원한다. '참'이라는 접두어가 주는 진정성에 대한 믿음 때문이지만 숯의 품질 때문이기도 하다. 화력이 좋고 오래 타는 참숯은 이런 과정을 통해서 만들어진다. 원료와 시간의 완전체인 숯, 그 수고로움과 기다림의 모든 과정은 바로 아버지의 마음이다. 행여나 숯가마의 불이 꺼지지는 않을까, 노심초사하면서 살피는 숯할아버지. 뜨거운 열기를 내뿜는 숯가마 옆을 떠나지 않는 마음이야말로 숭앙받아 마땅한 장인 정신이다. 

오늘날 숯이 땔감으로 쓰이는 경우는 드물다. 대부분은 생선이나 불고기를 굽는 도구로 쓰일 뿐이지만 숯이 만들어지는 과정은 만만치 않다. 자식을 키우는 정성과 비견될 정도다. 자식들이 옹골차게 여문 열매로 자라길 바라는 마음, 부디 세상의 빛이 되길 바라는 아버지의 마음들이 숯을 굽는 과정으로 묘사된 책. 특별한 장치가 없이도 속속들이 녹아있는 아버지의 마음을 되짚어 보게 된다. 가족의 생계에 대한 무거운 책임감으로 가슴이 숯처럼 까맣게 타는데도 아버지는 내색하지 않는다. 자신보다는 가족을 위한 오롯한 마음 하나로 벌겋게 달아올라야 하는 고단한 일상을 묵묵히 견디는 사람이다.

"그래도 가족을 위해 뜨거웠으니 그걸로 된 거야"

가족을 챙기느라 시커멓게 탄 가슴만 남은 숯할아버지의 독백은 쓸쓸하기보다 그윽하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 참으로 어른다운 말은 내가 아닌 누군가를 위해 뜨거움을 견디는 숯의 오롯한 성질과 닮아있다. 

이 책은 숯덩이가 된 가슴을 생색내지 않고 가족을 지켜낸 세상 아버지들의 이야기다. 마음이 해이해지고 감정에 불순물이 생기려 할 때면 가끔 뒤적이곤 한다. 그럴 때마다 가슴에 남는 뭉근한 감동이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어떤 것이든 자신에게 주어진 문제를 책임지는 자세와 그런 삶의 지혜를 숯이 되는 과정으로 풀어낸 이야기. 숯과 나무의 색감뿐이라 무채색에 가까운 그림도 은은한 감동이다. 표지에 그려진 숯할아버지의 둥그스름하니 듬직한 어깨는 눈길보다 마음을 끄는 힘이 있다.

두껍지 않음에도 내용이 웅숭깊다. 무게감 있는 문장과 그에 걸맞은 그림으로 펼쳐진 모든 페이지가 가슴을 뭉클하게 한다. 이야기와 그림 속에 녹아든 숯할아버지의 거룩한 책임감과 같은, 세상 아버지들의 수고로움을 새삼 되새기자니 슬그머니 미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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