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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수향 시인
심수향 시인

우리나라 여름은 맹하 무렵 잠시 보여준 맛보기 더위와 우기를 앞세워 다이빙하듯 계절 속으로 뛰어든다. 하지만 올해 영남 지역 여름은 신고도 없이 훅 들어온 느낌이다. 비가 사라진 장마…. 와야 할 비는 오지 않고 저수지가 바닥을 보이며 타 들어간다고 연일 보도 중이다. 감질 나는 비 소식과 절대부족 강우량으로 낙동강 물을 사다 먹는 울산은 더욱 목이 마르다. 기우제라도 올리고 싶은 심정이다. 도시민도 이러할 진데 농사를 짓는 농심은 오죽할까?   

지금 우리 모두가 애타게 기다리는 것은 시원스런 비다. 이렇게 기다림이란 절실함과 비례하는 것이어서 우리네 가슴 속에서 크고 작은 가지를 늘이며 태어나고 자라나는 것이다.

쨍한 하늘을 올려다보며 오일장에 나갔다. 노지 채소들은 뻣뻣하거나 거칠다. 가뭄 흔적이 보이는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콩물이 생각나서 두부 집에 들렀다. 두부랑 콩물 한통 주문했더니 초로의 부인이 '나도 기다리고 있다우. 우리 같이 기다립시다. 기다림이 없다면 우리 무슨 맛으로 살까요?' 하며 하하 웃는다. 오랜만에 아무 계산 없는 그 맑은 웃음에 감염되어 기꺼이 기다림에 동참하였다. 얼마 후 뜨거운 두부와 차디찬 콩물을 양손에 나누어 들고 '기다림이 끝나 먼저 갑니다' 인사를 하고 나왔다. 오면서 생각해보니 기다림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한 개 기다림이 끝났을 뿐 또 다른 기다림이 생겨나 있었다. 시원한 한 줄기 비는 큰 기다림이지만 그보다 먼저 나의 갈증을 식혀줄 한 사발 물을 기다리며 발걸음 재촉하는 내가 보였다.

좀 전 그 부인의 말처럼 우리는 끝없는 기다림 속에 살고 그 기다림이 주는 즐거움으로 살고 있다는 말에 깊이 공감한다. 어려서는 시장 간 엄마를 기다렸고, 맛있는 눈깔사탕을, 학교에 들어가서는 좋은 친구와 좋은 성적을 기다리었고, 성인이 되어서는 마음 맞는 연인을 결혼을 아이를 성공을 기다리며 살아온 길이 보인다. 따지고 보면 생의 묘미인 사랑 성공 명예 또한 기다림의 한 모습이고, 꿈과 희망이라는 또 하나의 다른 이름을 가진 기다림이라고 생각한다.

가슴 속에 자라는 것이 기다림뿐일까? 크고 작은 기다림이 이룩되었거나 이룩되지 못한 채 지나가버리고 나면 그 후 그리움이라는 형태로 가슴 속에 저장되는 것이다. 후회와 반성이라는 이름으로도 저장되는 이것은 그리움이란 큰 틀 안에 함께 있어 내가 감상적이 되거나 나약해질 때 곁에 있어주는 좋은 친구다. 그렇다면 현재는 어디에 있는 걸까?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이 학생들에게 수차 일러주던 '카르페디엠'이란 말을 떠올린다. 우리말로 '현재를 잡아라'로 번역되는 이 라틴말이 생겨났던 그 시대로 돌아가 본다. 그 먼 시대에도 지금처럼 시간을 흘리며 사는 이들이 많았기 때문에 생겨난 말이려니 유추해본다. 허나 무엇으로 현재를 잡을 수 있을까. 불교경전 임제록에서 임제 스님은 '수처작주 입처개진' 이란 말씀을 던졌다. 이 말씀은 '이르는 곳마다 그 자리의 주인이 되면 서 있는 그 자리가 진리의 자리다' 라는 뜻으로 새긴다. 이 말씀 속에도 역시 지금 내 발 아래 현재에 충실하라는 속뜻이 있다한다.

하지만 나는 지나간 과거는 그리움이란 이름 아래, 아직 오지 않은 미래는 막연한 기다림으로 살면서 너무 많은 현재를 흘려버렸다. 돌아보면 감상과 분노 잘못 판단한 생각들로 놓쳐버린 시간과 기회들이 너무 아깝다. 젊었던 시절에는 내 앞에 화수분 같은 젊음이 있을 줄 알았고, 노년에 와서도 두뇌 회전이 조금 떨어지는 정도로만 생각했지 이렇듯 많은 것들을 한꺼번에 잃게 되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어느 순간부터 눈뜨면 하루가 덤이라는 마음으로 대충 살았으니 인지 이후 시간 또한 마냥 흘린 셈이다. 세월이 쏘아놓은 화살 같다는 이 낡은 말에 절대 공감하는 날이 오리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 했다. 이렇게 현재라는 시간은 나를 스쳐 찰나에 지나가고 있다.

누군가 준비도 노력도 없이 지금보다는 낫겠지 하며 막연히 미래를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혹시 없는지, 열정을 쏟아 부은 일 한두 번 실패 끝에 탄식과 자책으로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지 않은지 염려된다. 후회로 시간을 보내버린다면 현재는 영원히 나의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몸으로 익혔으니 감히 언급한다.

흘러오는 강물에서 파닥거리며 사는 고기를 잡아내듯이 현재를 노려보고 낚아채는 사람만이 성취와 성공을 거머쥘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준비와 노력은 필수다. 한발에 시달리는 이 더운 여름 시원한 비와 서늘한 가을을 기다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더위 속에서도 찰나 찰나 스쳐가는 현재를 주시하며 내 것으로 만들 뭔가를 획책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무엇이라도 좋다. 살림이든 글이든 운동이든 치료든 사업이든 그것이 무엇이건 현재라는 이 순간을 포착할 시도라도 해 보아야 한다. 우선 마음자세부터 바꾸고 시간 앞에 서 보자. 그리고 노력해 보는 것이다. 성공은 결과지 과정이 아니다. 결과만 바라보는 자세를 바꾸고 과정에 힘을 쏟아야 한다. 더위도 물러날 만치 진지하게…. 순간 순간 늘 깨어 현재라는 시간과 맞서자고 스스로에게 지금 주문을 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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