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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지역에서 새로운 도약을 꿈꾸며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지역 인물들이 있다.
이전의 경력과 경험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도약을 꿈꾸는 3명을 만나 일과 목표 그리고 내일을 고민하는 이들에게 던져주는 한마디 등을 들어본다. 편집자

 

이명준 '더한' 한복 스타트업 대표
이명준 / '더한' 한복 스타트업 대표

이명준 '/ 더한' 한복 스타트업 대표

"작은 목표 점처럼 모여 발판돼...아무것도 안하면 점도 못 남겨"

UNIST 입학 계기 울산 정착중 한복에 관심
전공 접목 재생·재활용 소재로 제작 꿈 도전 

서울에서 태어나 수원에서 고등학교까지 마친 이명준씨는 2013년도 울산 유니스트에 합격에 울산으로 내려왔다. 
 함께 학창시절을 보낸 친구들은 대부분 서울 경기권 대학으로 진학한 탓에 이명준씨의 대학 새내기 생활은 진정한 홀로서기의 시작이었다. 


 수도권에 비해 외진 곳에 자리한 유니스트, 그리고 울산은 한편으로 가족, 친구들에게서 멀리 떨어진 자신과 참 비슷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이러한 동질감은 이명준씨의 자기발전 의지와 맞물려 나와 닮은 이 도시와 내 스스로를 성장시키자 라는 강력한 원동력으로 재탄생하게 된다. 


 유니스트에서 화학공학와 환경공학을 복수전공한 이명준씨는 졸업후 화학연구원 일과 대학원 학업을 병행하던 중에도 다양한 분야를 탐색하는 단체 활동 또한 열정적으로 참여했고, 그러던 중 2021년 새로운 산업에서 가능성을 보았다. 이는 바로 '한복'. 평소에도 공익관련 산업에 관심이 많던 그는 한복의 대중화 그리고 나아가 국제시장에 한복의 미디어 노출도를 높이고 싶다는 꿈을 가지게 된다. 


 이명준씨는 밖으로 나가 하루 하루 작은 목표를 달성해가며 마침표를 찍어나가는 것을 택했다. 
 시장 조사하기. 한복패턴 공부하기. 한복홍보대사 지원하기. 한복 관련 프로젝트 준비하기…
 그리고 그 작은 목표들의 마침표들을 모아 선을 만들어 문화체육부 장관상에 도달했을 때,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명준씨는 이를 발판삼아 현재 한국전통문화기획단 더한 창업팀을 구성해 활동 중에 있다. 현재 더한의 주력 프로젝트는 한복대여업과 굿즈제작 및 판매이며 제로 웨이스트를 지향한다. 
 이명준씨는 본인의 전공인 환경공학과 접목해 미래에는 업사이클링 프로젝트를 통해 한복을 재생소재 혹은 재활용소재로 제작 판매하고자 하는 장기 목표도 가지고 있다. 


 이를 누구보다 잘 아는 이명준씨와 스타트업 더한의 하루는 숨가쁘다. 
 바이아띠에서 생활한복 홍보대사를 하며 받는 수수료, 울산경제진흥원에서 진행하는 울주 CEO 청년사업가 프로그램 등 청년 창업 관련 지원 프로그램에서 받는 활동금과 보조금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는 것부터 SNS 홍보글 업로드 및 청년 축제와 협업을 추진하고 젊은 세대들의 패션 액세서리 문화인 피어싱과 한복의 콜라보레이션 진행까지 쉴틈없이 계속 되는 일정 속에서도 이명준씨의 표정은 밝기 그지 없다. 


 이렇게 묵묵히 찍어나가는 점들이 쌓여 하나의 선이, 그 선들이 쌓여 더 두꺼운 선이, 그리고 그것들이 쌓여 발판이 돼,그를 더 높은 곳으로 이끌 것이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다. 
 그에게 과거 스무살의 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냐고 물었을 때 그의 대답은 "지금도 잘하고 있다!" 였다. 이는 그의 철학과도 관통한다. 


 그는 내일을 고민하는 울산의 청년들에게 말한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실패도 하지 않지만 점도 남기지 못한다. 우리와 함께 활동하면서 점을 찍어나가 보자" 고.  김수빈기자 usksb@ 

 

민훈기 / 근로복지공단 근무
민훈기 / 근로복지공단 근무

민훈기 / 근로복지공단 근무

"사람마다 각자 자기 길 있어...즐기는 사람이 축복받는 사람"

울산지역 환경문제 전문가로 14년 동안 활약
70대 나이 극복 젊은세대와 소통·끝없는 배움

한 때 울산지역의 환경문제에 대한 전문가였던 민훈기씨는 요즘 제2의 삶을 살고 있다.
 지난 2019년부터 근로복지공단 울산지사에서 근무하며 젊은 직원들과 같이 요즘 젊은이들의 사고방식을 배우고 있다.


 민씨는 경남고를 졸업해 부산대 공과대 화학공학과을 진학해 총학생회 학술부장을 했다.
 이후 울산으로 올라와 영남화학에 입사를 했고 20년 동안 엔지니어 생활을 하며 파란만장한 인생을 보냈다.


 박정희 정권 하에서 3년 간 우라늄 원자력발전소 기술자로 일하기도 했다는 그는 취재진에게 우라늄 발전 공장에서 일하던 사람들만 받을 수 있는 기념품을 보여주며 "원자력 발전소 및 핵무기의 원료로 들어가는 우라늄을 3곘가량 생산했다"며 "그런데 10·26 사태로 박 대통령이 서거하면서 우라늄 발전이 미국에 의해 중단됐다. 기술자였던 우리들도 한순간에 실업자가 됐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그는 오랜 기간 기술자로 일하던 경력이 있어 울산상공회의소와 여러 회사가 참여한 울산환경개발(현 (주)코엔택)에 기술부장으로 이직했다.
 이후 코앤텍을 거쳐 (주)크린텍을 설립해 삼산배수장의 악취 해소에 도움을 주는 등 환경분야에서 활약하며 14년을 보냈다.


 한평생 환경 분야에서 일했던 그는 이제 근로복지공단 울산지사에서 젊은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삶의 태도에 대해 배우고 있다.
 민씨는 요즘 2~30대와 함께 일하면서 자신이 그동안 살아왔던 시대와 다르다는 것을 느꼈다고 했다.
 새로운 시대를 이끄는 젊은 사람들에 맞춰 자신도 변화해야 한다는 것을 느끼며 지금은 모든 것을 솔선수범하는 자세를 가지고 일한다고 했다.


 "지나간 세월보다 앞으로의 일이 중요하다고 본다"며 새로운 인생에 대해 평한 민씨는 아직도 배울 것이 많다고 느낀다.
 그는 요즘 일과 별개로 취미생활에도 많은 시간을 투자한다.
 일주일에 3일씩 포크 기타를 배우고 영어회화반에서 일상 회화를 배운다는 그는 이 모든 것을 위해 체력관리에도 열심히 하고 있다.


 민씨는 '하늘은 스스로를 돕는 자를 돕는다'며 스스로 노력을 하는 과정에서 자기만의 길을 만들 수 있고 자신의 뜻을 더 크게 펼처나갈 수 있다고 말했다.


 요즘 젊은 세대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사람마다 다 길이 있으니까 좁게 생각하지 말고 넓게 생각하며 인생을 즐겼으면 한다"며 "노력하는 자는 즐기는 자를 절대 이길 수 없다는 말처럼 오랜 세월 살아오면서 즐기는 사람이야 말로 축복받는 사람이다"고 했다.
 70대의 나이에도 새로운 도전에 망설임이 없는 민훈기씨의 모습은 그 누구보다도 기운차고 빛이 났다. 김경민기자 uskkm@

 

임태인 / 울산과학대 만학도
임태인 / 울산과학대 만학도

임태인 / 울산과학대 만학도

"전례 없다면 내가 1호라는것...두려움 뒤로 하고 일단 해보길"

경찰행정·영문학 거쳐 스포츠지도과 진학
바쁜 두번째 스무살 보내며 후배 양성 꿈꿔

첫번째 스무살. 대학 진학을 결정한 많은 이들이 처음으로 자신의 선택을 마주하는 나이. 그리고 그 선택이 과연 진정한 자신의 선택이었는가 에 대한 고민을 시작하는 나이. 첫 진로, 대학의 경우, 고등학교 성적에 의해 제한되기도 하고, 경제사정, 혹은 부모님의 바람이 나의 바람인 양 착각하게 되기도 한다. 


 임태인씨의 스무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체육과 영어를 좋아했던 임태인씨는 체대 혹은 영문학과 진학을 꿈꿨으나 부모님의 반대에 부딪혔다. 체대는 당시 인식이 부정적이며 장래가 불확실하다는 이유로, 영문학과는 집안이 추구하는 의대 혹은 법대 계열이 아니라는 이유로 두 번의 반대를 접한 임태인씨는 결국 부모님이 원하던 경찰행정학을 카톨릭관동대에서 전공하게 된다. 


 하지만 본인의 의사가 크게 반영되지 않았던 스무살의 선택이 본인에게 맞지 않는 옷이라는 것을 대학생활 4년에 걸쳐 깨달은 임태인씨는 졸업 후 10년간 영어강사를 하며 방송대학 영문학과를 재진학 하는 등 새로운 진로를 탐색했다. 이후 영문학 석사까지 취득한 임태인씨는 이에 멈추지 않고 다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다. 
 '이것이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것인가?' 그리고 이는 임태인씨를 현재 울산과학대학교 스포츠지도과 4학년으로 이끌었다. 


 만학도로써의 대학생활은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임태인씨에게 이는 첫번째 스무살이 아니었기에, 그저 학생이기만 하면 됐던 스무살때와는 달리 생활 고정지출과 자동차 유지비 등을 부모님의 금전적 지원 없이 혼자 감당해야했기 때문이다. 다행히 울산과학대에서 전액장학금을 지원해 당장 학비에 대한 부담은 덜었지만 대학원 진학 또한 염두에 두고 저축을 하는 동시에 생활비도 해결을 해야겠기에 임태인씨는 학업과 여러 개의 파트타임 일을 병행해야했다.  


 만학도라는 타이틀 아래 편견을 만들고 싶지 않았던 임태인씨는 먼저 벽을 허물고 동기생들에게 편안하게 다가갔고 그들 또한 이러한 그를 편견 없이 또다른 학생, 친구로 받아들였다. 
 진정한 자신의 꿈을 찾은 임태인씨는 열정적으로 학업에 임했고 현재 그녀의 성적은 4.47 학점, 석차 1등이다. 


 임태인씨는 운동을 통해서 생명을 구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의료기술이 이미 생긴 병을 치료한다면, 적절한 운동은 이를 예방하는데 큰 도움을 준다고 생각하는 임태인씨는 본인이 얻은 지식과 경험으로 사람들을 돕고 사회에 기여하는 미래를 꿈꾼다. 대학원 진학을 계획하는 것도 이를 통해 더 많은 이들이 본인과 같은 꿈을 꾸고 이를 이루어 더 많은 사람을 도울 수 있기를 소원하기 때문이다. 임태인씨는 울산대학교 체대 대학원 진학 후 기회가 주어진다면 울산과학대에서 모교 후배 양성을 꿈꾼다. 


 임태인씨, 그리고 그의 여정은 수많은 '지금은 시작하기에 너무 늦었다' 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생각의 전환을 말한다. 
 '전례가 없어'가 아니라 '그렇다면 내가 1호가 될 수 있다'고. 두려움을 잠시 뒤로 하고 일단 시작해보라고. 김수빈기자 usks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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