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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행성 슬픔

김 휼

바람이 멈추면 내 슬픔은 구체적이 됩니다

봄 흙에 젖살이 내릴 즈음 연둣빛 말문을 텄지요 태생이 곰살맞아 무성한 소문을 달고 살았어요 잘 여문 눈빛으로 성장기는 푸르게 빛났습니다

귀가 깊어 누군가의 말을 들어주는 일을 도맡았습니다
여름이 다 지나던 어느 날, 번쩍, 순간을 긋고 가는 일성에 난청을 앓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만나야 할 사람만 만나며 살았습니다 해야 할 일만 하고, 가야 할 곳만 갔습니다 말할 수 없는 일에는 침묵하며 지냈습니다
참는 게 버릇이 되어버린 직립은 퇴행성 슬픔을 앓기 시작했습니다
구부러지지 않은 밤을 뜬눈으로 지새야 했으며 뼈마디에서는 바람 소리가 들렸습니다 손가락 뼈들이 뒤틀리고 있지만 경탄을 잃지 않으려 식물성 웃음만 섭취해 보는데 오백 년이라는 치명적 무게를 가진 저로서는 피할 수 없는 강이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가끔 은닉하기 좋은 새의 울음을 걸어 두고 몽상에 듭니다

오늘은 청명, 누군가 시름 깊은 방에 들어 푸른 잎사귀 몇 장 머리맡에 두고 갑니다
시간이 갈수록 속으로 쌓이는 회한은 나이테를 감고 도는데 움켜쥐면 구체적이 되는 슬픔, 나는 지금 옹색한 옹이를 창 삼아 세상과 단절을 면하고 있습니다

하늘이 신앙이 되는 것은 타당한 일입니다

△김휼시인: 전남장성 출생. 2007년 '기독공보' 신춘문예 당선, 2017년 '열린시학'으로 등단. 시집 '그곳엔 두 개의 달이 있었다'. 백교문학상, 여수해양문학상, 목포문학상 등 수상.

나이가 점점 더 들어가면 귀 닫고 입 닫고 눈은 크게 뜨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귀가 깊어 누군가의 말을 다 들어 주었음에도 어떤 말들은 와글와글 끓어 넘쳐서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어 안달하는 것이다. 말해 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꼭 그래야 할 것 같아서, 그렇지만 끓는 말들은 결국 녹을 붙여 독이 되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니 어쩌나.
 
 코로나 시기에는 만나야 할 사람만 만나고 해야 할 일만 하게 되고 가야 할 곳만 갔고 말할 수 없는 일에는 침묵하며 지내야 했던 날들이었다. 선의로 나선 일에도 오해와 해명의 코스를 밟아야 하며 부당함을 보고도 외면하여 세상의 중심에서 점점 밀려나는 퇴행의 과정은 시나브로 스스로를 갉아대는 불면의 밤을 앓게 되었던 것이다. 뼈마디에서는 경고음을 내어 불면을 자폭시키려 하지만 이미 뒤틀리기 시작한 뒤다.  
 아낌없이 주는 나무, 또는 키다리 아저씨를 상상하면 행복한 하루가 되고 오백년 천년을 싱싱했으면 좋겠다 이 나무. 상상은 가슴 속 피 흘리는 상처를 메우고 새 살 돋는 연고가 된다. 오랫동안 보고 들은 것을 나이테로 칭칭 감아 놓았으니 생각해보면 그것이 뼈대가 되는 구체적인 슬픔이겠다. 그리고 단단한 옹이는 상처가 만든 소통의 창구가 되어 불룩한 상상으로 두꺼운 비밀이 만들어지겠다.
 

박정옥 시인
박정옥 시인

 수 백 년 은행나무의 서사가 인생의 대하소설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발버둥 쳐도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의 반경, 상처는 그 속을 들여다봐야 어떤 약발을 받는지 알 수 있다. 이 과정이야말로 자기 승화가 아닌가. 슬픔과 우울의 관계는 디테일에서 분리된다고 했던가. 퇴행성을 걸고넘어지는 이 비유와 상징을 누가 좀 시원하게 긁어 주었으면 좋겠다.
 박정옥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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