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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세미 중구 문화관광과 주무관
임세미 중구 문화관광과 주무관

"울산 중구가 한글도시라고요? 왜요?" 

한 친구에게 울산 중구가 한글도시라는 점을 알려 주자 내뱉은 첫 마디였다. 

이 친구는 대학원까지 국어를 전공했다. 

국어 전공자조차 의문을 갖다보니 일반 사람들에게 울산 중구가 한글도시가 되어야 하는 이유는 쉽게 떠오르지 않으리라 짐작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한글'하면 '세종대왕'과 한글학자 '주시경'을 먼저 떠올린다. 

세종대왕은 조선시대 손꼽히는 성왕이자 위대한 한글을 창제한 인물로 한국 사람이라면 당연히 알고 있는 위인이다. 

한글학자 한힌샘 주시경 선생은 어떠한가? 

학창 시절 국사 또는 국어 수업에서 한글을 발전시킨 위인으로 배웠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주시경 선생은 한글이라는 이름을 만들고 최초의 한국어 문법서 <국어문법>을 썼지만 안타깝게도 가슴에 품은 뜻을 다 펼쳐보지 못한 채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하지만 다행히도 주시경 선생은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고 그 가운데 한 명이 바로 외솔 최현배 선생이다.
 이 지점에서 드디어 울산 중구와 한글도시의 연결점이 생긴다. 외솔 최현배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도시가 바로 울산 중구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외솔 최현배 선생에 대해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이름은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지만 무슨 일을 했느냐고 물어보면 잘 모르겠다는 사람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필자는 주시경 선생 못지않게 외솔 최현배 선생이 한글 발전에 많은 역할을 했다고 생각한다.

외솔 최현배 선생이 활동하던 시기는 창씨개명과 함께 조선어 말살 정책이 실시되던 일제강점기로 한글이 한글로서 온전히 살아남기 힘든 때였다. 

하지만 외솔 최현배 선생은 일제의 탄압에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도 한글을 지키고 발전시키겠다는 뜻을 꺾지 않았다. 

서슬 퍼런 일제의 눈을 피해 한글 맞춤법을 통일했고 조선사상범 구금령이 실시돼 언제든지 일제에 검거될 수 있는 위험한 상황에서도 우리말 큰사전을 만들기 위해 분투했다. 

결국 사전을 만드는 것이 발각돼 징역을 살아야 했지만 결코 일제에 부역하지 않았다. 

해방 후에도 쉬운 길을 걷지 않았는데 '벤또'를 '도시락'으로 바꿔쓰자고 제안하는 등 일본어의 잔재를 없애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했고 교과서를 한글로만 쓸 것과 가로로 쓸 것을 주장해 법률 제정까지 이끌어 냈다. 

한글을 소리 나는 대로 쓰자고 주장하는 한글 간소화 파동 때는 문교부 편수국장직을 내놓으면서까지 이를 막기 위해 애썼다. 

또한 1969년 기득권층이자 지식인들이 한자를 혼용해 쓰자고 주장하자 다른 학회들과 힘을 합쳐 한글 전용 운동을 펼치는 등 그야말로 한글을 지켜내기 위해 온 생애를 바쳤다. 

세종대왕은 한글을 창제했고 주시경 선생은 한글 연구의 정신을 세웠다면 외솔 최현배 선생은 그 정신을 몸소 실천하신 분이라고 생각한다. 

울산 중구는 이러한 외솔 최현배 선생의 정신을 계승해 한글사랑 문화 확산에 앞장서고 있다. 

한글도시를 선포한 데 이어 한글사랑추진위원회 발족, 주민 대상 한글교육 실시, 쉽고 올바른 공공언어 사용 독려, 한글사랑 실천운동 전개 등 한글의 가치를 널리 알리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여기에 중구 주민들도 다양한 한글사랑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올바른 한글 사용에 솔선수범하는 등 한글을 소중하게 아끼며 지켜나가고 있다.

이제 울산 중구가 왜 한글도시가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조금 해소되었으면 한다. 

앞으로 울산 중구가 누구나 인정하는 '한글도시'로 도약할 수 있도록 지역사회 전체가 '한글이 목숨'이라고 외쳤던 외솔 최현배 선생의 뜻을 되새기며 한글에 관심을 갖고 한글 부흥에 앞장서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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