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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성길 시인·평론가
안성길 시인·평론가

멀지 않은 과거 우리네 사회에 한창 핵가족화, 도시화가 휘몰아치던 시절, 우리 사회 곳곳에서 가장 많이 들리던 소리는 "세상이 너무 빠듯하고 각박하다."는 말이었다. 대다수가 궁핍한 일상에는 인간적인 시선이나 여유를 찾는 건 많이 어려워보였다. 소위 나 아닌 타자의 삶에 대해 몰이해와 방관이 난무하는, 그래서 이해와 배려가 참으로 부족한 사회를 이른바 '각박하다'고들 했던 것이다. '각박(刻薄)'은 글자 그대로 사람을 대하는 마음을 '깎고 줄이어 해치는 쪽으로만 마음을 먹고, 이해나 배려 곧 인정을 너무 엷게 쓴다.'는 뜻이다.

 한편 조선의 레오나르도 다빈치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 율기 편에 보면, "과격한 행동과 각박한 정사는 인정에 맞지 않아 군자가 내치는 바이니 취할 것이 아니다."란 구절에도 '각박'이 보인다. 여기서 '각박한' 정사(政事)는 "민간의 물건을 사들일 때, 관에서 정한 가격은 대게 헐하고 박한 것을 따르게 마련"인 현실을 지적하며 "마땅히 시가대로 사들여야" 백성을 살피는 옳은 행정임을 강조하며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이 '각박함'의 맞은편에는 '풍성(豊盛)함'이 자리한다. 이 풍성(豊盛)한 삶을 인류 최고의 이상으로 본 명저는, 유태인이자 독일계 미국인 사회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 곧 'To Have or To Be'이다. 개략적인 요지는, 오늘날 문제가 연일 터져 나오는 현대인의 삶은 오로지 'To Have' 곧 물질과 명예 등의 '소유(所有)'에 매몰되어 있기 때문이라는 것. 그 해결책이 'To Be' 곧 '존재(存在)'를 지향하는 삶, 그러니까 도덕적이고 올바른 가치를 추구하는 삶다운 삶으로 전환하면 비로소 삶을 풍성하게 누릴 수 있게 된다는 것이다.

 심리학자 메슬로우는 동기부여 이론에서 인간의 욕구를 '생리적, 안전, 사회적(소속과 애정), 자존, 자아실현' 등의 순으로 모두 5단계로 체계화시켰다. 여기서 가운데 '사회적 욕구'는 달리 '소속과 애정에 대한 욕구'이다. 세상엔 별의 별 사람이 존재하듯 삶 또한 그렇다고 한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진실로 잘 사는 삶의 첫손에는 거의 예외 없이 이타적인 모습을 꼽는다. '이타(利他)'의 근본은 '이해와 배려, 사랑'이다.

 최근에 본 애덤 그랜트의 'Give and Take, 이타적인 사람이 결국 성공한다'에는 "사람들은 팀에 소속되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스트레스를 덜 받고 행복감이 커진다. 사람들은 남과 잘 어울리고 협력할 줄 아는 사람, 남을 배려하고 공동체 이익을 우선할 수 있는 이들을 좋아한다. 곧 이타적인 사람이 결국 승리하게 된다."는 내용이 핵심이었다. 그러니까 어딘가에 잘 소속되어 산다는 건 결국 가장 이타적인 삶을 산다는 뜻이기도 하다.

 다 타버린 '연탄재'를 노래한 안도현의 시 너에게 묻는다, 한 그루 사과나무와 그를 사랑한 소년의 이야기를 담은 쉘 실버스타인의 '아낌없이 주는 나무'를 다룬지 얼마 안 되어서다. 마침 울산인재평생교육원의 신중년 평생학습 지원 사업 덕분에 학교에서 '즐거운 동화구연' 수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며칠 전엔, 영국의 작가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를 가지고 동화구연 수업에 임했다. 40대에서 70대에 이르는 우리 학습자들이 그렇게 열심히 함께 구연 연습을 하며 행복해할 줄 몰랐다. 더구나 그 핵심 내용에 깊이 공감하며 구연에 몰입하는 모습에 정말 제대로 된 교학상장(敎學相長)의 시간을 가졌다.

 "어느 도시에  높이 솟아 있는 기둥 위에 순금으로 도금된 몸, 두 눈은 사파이어로, 차고 있는 칼자루는 빛나는 루비가 박혀있는 왕자의 동상이 서있었다. 사람들은 그 동상을 '행복한 왕자'라 불렀다./금으로 된 동상은 보는 사람마다 칭송과 칭찬을 하였다./그러던 어느 날 따뜻한 남쪽나라 이집트로 가던 제비가 우연히 왕자의 동상에 하룻밤 머무른다. 동상 밑에 잠을 청하던 제비는 자신에게 떨어지는 커다란 물방울이 행복한 왕자의 눈물임을 알게 된다./왕자는 제비에게 "내가 인간의 심장을 가지고 있을 때 난 눈물이 무엇인지 몰랐어. 그런데 내가 죽고 난 뒤, 동상이 되어서야 비로소 도시의 온갖 추하고 비참한 생활을 보고는 비록 납으로 된 심장이지만, 이렇게 하염없이 눈물이 흐르는 거야"라고 한다. 

 왕자의 이야기를 들은 착한 제비는 왕자의 부탁대로 도시 곳곳의 힘들어하는 이들(아픈 아들을 키우는 재봉사 여인, 가난한 희곡작가, 어린 성냥팔이 소녀,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는 사람들 등)을 돕는다. 그 결과 제비는 떠날 시기를 놓치고 결국 얼어 죽었고, 행복한 왕자의 납 심장 또한 제비의 죽음에 쩍! 하고 두 동강이 나고 말았다. 마침내 사람들은 금붙이도 보석도 없는 초라해진 동상을 흉물스럽다며, 용광로에 넣어 녹여버린다는 내용에 우리 학습자들은 흐느끼며 눈물을 흘리기까지 하여, 필자는 수업을 진행하다 말고 몇 번이나 가슴이 먹먹했었다. 비록 허구의 이야기지만 타인의 삶에 공감하며, 고통을 함께 아파하는 가슴이 많은 사회는 참으로 희망이 있다.

 지난 5월 한 할머니가 하는 모 샌드위치 가게에 결식아동이 만 원짜리를 크레파스로 그려 와서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그 순간 할머니는 거스름돈까지 쥐어 주며, "얘야, 거스름돈 가져가야지. 천천히 먹고 자주 와라."라고 말했단다. 이 일은 순식간에 온라인에 파져 많은 이들의 눈자위를 따뜻하게 붉혔다. 그 할머니야말로 참 아름답고 풍성한 삶을 살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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