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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이숙 수필가
강이숙 수필가

아이들이 초등학생이었을 때 이웃 절친이 교회 여름성경학교에 아이들을 보내자고 했다. 마침 방학이어서 안성맞춤이었다. 좋은 취지라 여기고 기꺼이 입교를 시켰다. 아이들도 적응을 잘했다. 무엇보다 집 앞에 교회차가 와서 데리고 가고 마치고는 또 데려다주니 안전하고 신경 쓸 일이 없었다. 

장난감 만들기, 그리기, 영상 시청 등, 다양한 학습 프로그램과 갖가지 체험은 아이들을 학습에 관한 흥미를 갖게 하는 데 한 몫을 했다. 더군다나 맛있는 점심에 간식까지 챙겨주어서 집에 올 때는 옥수수, 빵, 음료를 한 보따리 챙겨 와서 엄마한테 내놓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나도 덩달아 기뻤다. 

'이웃을 사랑하라' '범사에 감사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제대로 실천하는 교회에 신뢰가 갔다. 주일이면 나도 교회에 나갔다. 목사님 설교와 간증도 듣고 찬송가를 부르니 미음이 편했다. 부활절과 생명축제, 크리스마스 행사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나를 이끈 지인은 참 사람이 좋았다. 매사에 솔선수범하고 얼굴은 항상 부드럽고 온화했다. 구역예배는 돌아가게 하도록 돼 있었는데 주로 본인 집에서 했다. 가면 미안할 정도로 늘 음식이 한상 가득 차려져 있었다. '믿는 사람은 뭐가 달라도 다르구나' 하며 나도 그녀를 본보기로 삼아 신앙심을 키워나갔다. 

아이들이 초등학교 고학년에 올라갈 무렵 직장을 갖게 되었다. 따라서 교회 나가는 횟수가 자꾸 줄어들고 구역예배도 못 나가게 되어 면목이 없었다. 시댁과 친정이 조상대대로 불교를 믿었기 때문에 어른들을 대하면 스스로 위축이 되었다. 오빠는 대놓고 "너 그러려면 친정에 발길 끊어라"고 위협을 했다. 평소 인자하던 오빠의 단호한 모습에 나는 적잖이 당황했다. 그게 그렇게 인연을 끊을 정도로 잘못된 일인가 쉬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대답은 "예"하고 철석같이 해 놓고는 집으로 돌아오면 간간이 교회에 나갔다. 멀리 있어 매일 미행할 것도 아니니 눈치 볼 것도 없었다.

'종교는 하나다, 하느님과 부처님의 가르침은 동일하다'는 인식은 진작부터 나에게 각인되어 있었기에 누가 뭐래도 그런 명제 앞에서는 굴복할 수가 없었다. 

불교의 큰 행사인 백중, 동지, 4월 초파일이면 절에도 빠지지 않고 나갔다. 부처님께서도 '상구보리 하화중생', '자리이타', '자등명법등명' 등 주옥같은 깨달음을 뼛속 깊이 주셨다. 거기에 기초한 스님의 설법은 나를 부처로 만들어 주기에 충분했다. 

성당에 다니는 시댁 형님과는 친언니처럼 다정하게 지냈다. 형님은 친구가 수녀여서 그 영향으로 성당에 입문하게 되었다. 일상생활이 수녀 못지않은 청정함이 있었기에 나는 자연히 본받고 따르게 되었다. 배우고자 하니 세상천지가 스승으로 보였다.  

이렇게 두루두루 믿음과 신앙을 키워나갔다. 

어제는 성도재일 행사에 참석해 스님의 법문을 들었다. 일요일은 집 가까이 있는 교회에 나갔다. 내가 따르는 집사가 바로 옆 동에 살고 있어 둘도 없는 친구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며칠 후에 만나기로 한 형님과는 이해인 수녀님의 시집을 사러 서점에 가기로 했다. 수녀이면서 자연과 삶을 노래하는 시와 에세이로 메마른 국민들 가슴에 서정과 감성이 싹트게 한 수녀님 어디에서 종교의 색채를 느낄 수 있단 말인가?

이제는 여든을 바라보며 좋지 않은 건강으로 마지막 여생을 꾸려가는 수녀님의 데뷔작 '민들레의 영토'를 구매해 기념으로 간직하고 싶었다. 

내가 당당하니 주위의 시선도 두렵지 않다. 그동안 죄송스러워하던 시부모님, 친정 부모님, 오빠까지 모두 고인이 되었다. 해마다 백중 때 절에 가서 기도를 올리는 것으로 용서를 구하고 악행을 한 것에 참회를 올린다. 나의 종교 순례는 끝없이 계속될 것이다.

내가 믿었던 것, 지금도 믿고 있는 것, 

'종교는 하나다. 예수님과 부처님을 비롯하여 그 누구의 가르침도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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