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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훈 수필가
오병훈 수필가

기후가 점점 따뜻해지면서 우리나라에서도 바나나 같은 열대 과일 재배가 늘어가고 있다. 제주에서만 바나나 재배 면적이 7.3헥트아르이고 전국 생산량의 33퍼센트를 차지한다고 한다. 파초(芭蕉)는 바나나의 중국식 발음이다. 향초(香蕉), 북초(北蕉)라고도 하며 좀처럼 꽃을 볼 수 없다고 하여 우운화(優蕓華)라고도 부른다. 파초의 열매를 바나나라 하는데 재배 역사가 긴 만큼 열대 과일의 대표격이라 할 만하다. 파초는 꽃싸개잎이 흰색이고 바나나는 진한 자주색이다. 동남아시아 열대 원산이지만 인도를 거쳐 아프리카로 전해졌고, 신대륙의 발견으로 중남미에도 전해져 널리 재배되고 있다.

바나나의 원종이라 할 수있는 파초는 그 싱그러운 잎에서 느끼는 정취가 좋아 옛 선비들이 즐겨 가꾸었던 관상식물이다. 17세기 중국의 문장가 장조(張潮)는 그의 유몽영(幽夢影)에서 이렇게 말했다. '파초를 심는 것은 빗소리를 듣기 위해서이고 버드나무를 심는 것은 매미소리를 듣기 위해서이다' 현대인은 아파트 녹지에서 우는 매미소리가 듣기 싫다고 버드나무를 베어 버린다. 그들의 삭막한 마음이 어찌 파초의 운치를 느낄 수 있겠는가. 옛 선비들은 빗소리를 듣기 위해 파초를 심는다고 했을 정도로 좋아했던 관상식물이다. 파초 잎에 후드득 떨어지는 빗소리가 거문고 현을 울리는 청아한 음향과 같다고 했으니 얼마나 운치있는 관상식물인가.

삼국시대 불경의 유입과 함께 문헌에 나타난 것을 접할 수 있지만 실제로 정원에서 재배한 것은 고려 때로 보고 있다. 열매인 바나나를 따기 위해 재배한 것은 60년대 중반 제주도에서 비닐 온실을 만들면서 부터이다. 이재관(李在寬)의 파초제시도(芭蕉題詩圖)에서는 선비의 한유를 엿볼 수 있다. 이 그림은 선비가 한가한 여름 한 때를 홀로 보내며 파초잎에 시를 적는 장면이 잘 포착돼 있다. 초엽제시(蕉葉題詩)는 옛 문인화에서 흔히 보는 소재이다. 7세기 당대(唐代)의 승려 문인 회소(懷素)가 파초 잎에 글씨를 썼다는 고사에서 유래한다. 그는 속성이 전(錢)으로 자는 장진이며 중당시기의 시인이며 서예가이다. 초서를 미친듯이 갈겨 썼으므로 세인들이 광초(狂草)라고 불렀다. 종이를 살 돈이 없어 파초잎에 글씨를 쓰는 장면은 후학들의 작품 소재가 되기에 충분했다. 회소 이후 파초는 학문과 가난한 선비를 상징하게 되었다.

파초는 보는 것만으로 시원함을 느끼게 하는 여름의 상징물이다. 파초는 넓고 크다는 이미지가 있지만 오히려 큰 것을 작게 축소하여 보는 시각도 있다. 마르고 파리한 모습을 두고 넓은 파초잎에 견주어 초췌(蕉萃)하다고 하지 않던가. 물론 여기서는 비바람에 찢어진 파초를 일컫는 말이지만. 파초 잎사귀 모양을 한 얕고 너른 술잔 초엽(蕉葉)은 다루기는 조심스러워도 기막힌 운치가 있다. 꽃잎에 맺힌 이슬방울을 나뭇잎으로 모아 차를 우려내듯 아주 귀한 술을 마실 때는 반드시 초엽잔을 쓴다. 아껴가면서 조금씩 마시기 위해서이다.

 

소당 이재관의 파초제시도 芭蕉題詩圖.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조선 후기 화가인 소당 이재관이 그린 파초제시도. (芭蕉題詩圖, 고려대학교박물관 소장)

 우리나라 사찰의 산신각에는 산신을 모신다. 흰 수염에 대머리이고, 긴 눈썹을 휘날리는 노인이 호랑이나 흰 사슴을 거느린 모습으로 표현된다. 손에는 파초잎 모양의 파초선이나 불로초 등을 들고 있다. 주로 봉래(蓬萊)·영주(瀛洲)·방장산(方丈山) 등 삼신산을 배경으로 하고 소나무 아래 앉아 있다. 파초 줄기를 갈가리 찢어내면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다. 불경에서는 자신의 잘못이 쌓이면 파초처럼 스스로 멸망에 이른다고 경고하고 있다. 출요경(出曜經)에도 '파초는 열매를 맺으면 죽는다. 대나무와 갈대도 또한 같다. 노새도 새끼를 배면 죽는다. 선비가 가난하면 자신의 양심을 잃어버리게 된다.'

일본의 문호 나스메 쇼세키(夏目漱石)는 경전 구절을 인용하여 소설 도초(道草)에서 이렇게 적었다. '파초에 바나나가 달리면 다음 해 말라 죽는다. 대나무도 꽃이 피면 죽고 만다. 동물도 짝짓기를 하지만 새끼를 낳고 죽는 놈도 있다. 인간도 방탕하고 교만한 동물이어서 이러한 법칙에 따라 살아갈 뿐'이라고 했다.

파초 줄기는 감촉이 부드럽고 시원하다. 그 때문에 인도 고전문학에서는 파초를 여성의 아름다운 몸매에 비유하기도 한다. 파초는 버릴 것이 하나도 없는 유용한 자원식물이다. 잎을 삭혀 섬유질을 뽑아내고 이것으로 파초포(芭蕉布)를 짜면 매우 질기다. 선조 25년 류쿠국에서 온 사신이 파초포 20필을 조정에 진상했다. 또 잎과 줄기에서 뽑은 섬유로 종이를 만들기도 했다. 여름 파초의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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