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오양옥 시인
오양옥 시인

오늘은 영화 이야기로 시작해 보려 합니다. 톰 행크스 주연의 'cast away'와 본 시리즈로 유명해진 맷 데이먼 주연의 '엘리시움'이라는 영화입니다. 'cast away'는 정확하고 정직한 배송업체 직원이 비행기 추락으로 무인도에 표류하며 지내다 탈출하기까지의 상황을 그려낸 영화이고 '엘리시움'은 전쟁과 질병으로 병든 지구를 떠난 1%의 사람들이 우주에 만든 꿈의 나라 엘리시움, 그곳에 가기 위해 지구에 남겨진 이들이 고군분투하는 모습을 상상한 SF영화입니다.

무인도에 표류하였으나 곧 구조될 것이라는 톰의 희망은 분노가 되고 탈출에 실패하며 좌절까지 이릅니다. 이후 함께 표류된 배송품들을 하나씩 뜯어보며 물품과 관련한 사연도 읽으며 하루하루를 보냅니다. 그 물품 중 하나가 제조회사의 이름을 붙인 배구공 '윌슨'입니다. 톰이 윌슨을 사람처럼 꾸며놓고 대화하는 모습에서 외롭게 살 수 없는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걸 느끼게 합니다. 그저 배구공인 윌슨이 바다 밑으로 사라질 때 오열하던 톰의 모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엘리시움에서의 화려한 기술적 내용은 차치하고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미래의 병원 모습 중 한 장면입니다. 환자가 한 장비 위에 올라가 누워 버튼을 누르니 장비는 곧 환자를 좌우로 스캔하고는 "00 암입니다"라고 진단하고 "치료되었습니다"라고 말합니다. 그 순간 "캬~ "하는 탄성이 절로 나왔습니다. 환자와 그를 돌보는 자, 지금의 북적거리는 병원과 사뭇 다른 모습은 인상적이었고 많은 사람이 직업을 잃을 거란 생각에 소름이 돋았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두 영화는 시대적 배경도 영화를 끌어가는 힘도 달랐지만, 인간은 역시 혼자 살 수 없으며 따듯한 손길 진정 따듯함을 원하는 존재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고령화 사회를 넘어 초고령화 사회라는 말이 이젠 어색하지 않습니다. '오래 살고 싶다'라는 본성과 '오래 살면 뭘 하지'라는 보장되지 않은 미래의 두려움은 함께합니다. 인간의 오래된 본성과 돌봄이 필요한 시대상에 근거하여 생각해보면 항간에 잊혀질 만하면 일어나는 간호법 제정 문제에 대한 갑론을박이 이해되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간호법 제정을 반대하는 단체의 정확한 주장이 무엇인지, 무엇을 위한, 누구를 위한 반대인지가 명확하지 않고 의도가 불투명한 게 신기루 같아 법제정을 둘러싼 반대 측 입장이 못내 아쉽습니다.

법이라는 것이 뚝딱 만들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법은 소수보다 다수를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 보편적입니다. 소수의 국민일지라도 법을 통해 보호를 받을 수 있는 '민식이법'과 '김영란법'은 어린이의 안위를 염려하고 부정 청탁을 막아 청렴한 공직문화를 이루자는 뚜렷한 목적이 있습니다. 그런데도 30의 속도가 불편한 사람들은 시간에 따라 다른 가변 속도 규정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선물 주고받기의 인습이 사라진 것이 좋으면서도 情의 문화가 사라짐이 아쉽다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어찌 보면 그들만의 리그 같기도 한 이 법은 사회적 이슈를 담고 있기에 그나마 법제정에 영향력이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법 제정의 필요성은 피부에 와닿지 않으면 국민적 호응을 끌어낼 수 없고 나아가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여기는 마음이 서로 다른 생각들을 불러올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간호법은 어떤가요?

간호법, 이 돌봄에 관련한 법은 전 국민에게 해당하는 법입니다. 우선 care와 cure에 대해 쉽게 이해해 보면, 위암으로 예상되는 환자가 입원했다고 가정할까요. 의사의 경우 병증을 정확히 진단하여 위암임을 확인한 뒤 수술의 범위를 정하고 수술을 통해 암의 전이를 막고 의학적 진단에 대한 치료에 분명 열과 성을 다한 의료행위를 할 것입니다. 이것은 cure라 할 수 있습니다.

간호는 care입니다. 돌봄이란 의미입니다. 위암 환자의 경우 돌봄은 통증으로 인한 환자의 고통, 불면, 먹지 못해 생기는 다양한 문제를 도와주며 아픈 환자로 인해 오는 가족의 불안정함을 돌봐주는 등 간호가 필요한 문제에 대한 간호학적 진단을 해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출생에서 사망까지 일반적인 돌봄의 넓은 범위 안에 간호학적 돌봄과 의학적 치료가 포함되어 있다고 하면 이해가 쉽지 않을까요. 특히나 돌봄이 필요한 초고령화 시대가 되었고 그에 따라 요구도 증가하고 있습니다. 돌봄의 영역을 벗어나 치료가 필요할 경우 병원으로 안내하는 시스템이 초고령화 시대에서 꼭 필요한 보건 의료체계가 아닌가 합니다. 의료의 손길이 잘 닿지 않는 도서산간 넓은 지역사회를 생각한다면 제대로 된 돌봄이 필요한 국민을 위해, 의료인 중 많은 부분을 차지하여 돌봄을 수행하는 간호인의 효율적 관리를 위한 돌봄에 관한 법, 간호법 제정은 당연한 듯 보입니다.

제 어릴 적엔 아들딸 둘만 낳아 잘 기르자는 산아제한 정책을 썼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제발 아이를 하나라도 더 낳아 달라는 출산 장려정책을 쓰니 한 치 앞도 못 보는 정책이 아쉽기만 합니다. 민식이법이나 김영란법과 비교조차 안 되는 전 국민을 위한 돌봄에 관한 법, 이 법이 간호법이지 간호사를 위한 간호사법은 아닙니다. 부디 '긴 병에 효자 없다'라는 말처럼 자녀도 끝까지 다 할 수 없는 돌봄에 대한 의미를 담은 법이 간호법이며 70여 년이 훨씬 넘은 시대착오적 간호의 틀을 벗어나 제대로 그 역할을 하겠다는 간호인들의 정체성과 의지가 간호법에 있음을 이해하면 좋겠습니다. 간호는 돌봄입니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