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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정화 시인
정정화 소설가

노란 은행잎이 질 때 밀양에 있는 금시당 백곡재에 다녀온 적이 있다. 금시당은 조선 명종 때 좌부승지를 지낸 금시당 이광진이 1566년에 지은 별장으로 제자들을 교육하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거기에는 마당 한 편에 자리 잡은 420년이 넘은 은행나무가 곧게 하늘을 향해 손을 뻗고 있다. 둥치를 안고 가만히 수액이 흐르는 소리를 들었다. 오랜 세월에도 도도히 흐르는 기상에 감탄하며, 사진을 찍은 기억이 선명하다. 그곳 배롱나무에 꽃이 피었다는 소식을 듣고 남편과 길을 나섰다.

초입에 차를 대고 걸어가는데 양옆으로 소나무 군락이 우람하다. 후끈한 바람을 타고 솔향이 날아들었다. 좁은 문을 들어가니 단아한 기와집이 우리를 반겼다. 굴뚝까지도 기품이 느껴지는 옛 기와집이 가슴에 와락 안긴다. 기와 담장 앞으로 진분홍 백일홍이 피어 운치를 더한다. 담장 너머로 휘돌아나가는, 밀양강 지류인 남천이 곡선으로 흘러 유려하다. 멀리 다리 밑 물가에는 더위를 피하는 인파로 북적였다.

매끈한 가지에 몽글몽글 피어오른 배롱나무꽃이 단번에 눈을 사로잡는다. 꽃송이에 코를 들이미는 순간, K 선배의 웃는 얼굴이 피어올랐다. 며칠 전, 선배와 팥빙수 가게에서 오후 시간을 보냈다. 예전에 내가 작가상을 받았을 때 선배가 새우요리를 사준 적이 있었다. 이번에는 내가 사려고 했는데, 선배는 한사코 팥빙수와 커피값을 지불했다. 경청을 잘해주는 선배라 그런지 내가 말이 많아졌다. 급기야 평소와 달리 속까지 털어놓았다. 내 고민에 선배는 인생 선배로서 귀한 조언을 해줬다. 저녁 시간이 다 될 때까지 수다를 떨어도 할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다. 내가 이야기하느라 선배는 자신이 팥빙수를 다 먹는다며 웃었다. 올여름에 울산소설가협회에서 출간한 문예지를 두 권 드렸더니 잘 읽겠다며 기뻐했다.

자리를 파하면서 선배는 팥빙수를 포장해 주겠으니 남편이랑 저녁에 먹으라고 했다. 선배도 포장해 간다면서. 나는 괜찮다고 선배 팔을 잡고 만류했다. 선배는 기어이 내 것도 주문해서 손에 쥐여 주었다. 남편을 대신해서 팥빙수 잘 먹었다는 문자를 했더니 장문의 답장이 날아왔다. 칭찬과 격려를 아끼지 않는 문장들이 화면에 가득했다. 허심탄회하게 얘기해줘서 고마웠다며, 마음을 나눌 수 있는 관계는 둘이 아닌 관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했다. 무명작가인 나를 유명작가로 치켜세우면서, 앞으로 더 유명해질 거라는 말로 용기를 북돋워 줬다. 무명작가로 글쓰기의 어려움을 토로해서 아마도 기를 살려주려는 의도가 아닐까 싶었다. 답장을 읽는 내내 치유받는 느낌이었고, 참 귀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며칠 후, 선배가 소설을 읽는 재미에 빠져 있고, 서점에서 노자와 물리학책도 구입했다며 독서의 즐거움을 알게 해줘 감사하다는 문자가 왔다. 후학 양성에 바쁠 텐데도 다방면의 독서는 물론이고 불교학에도 조예가 깊은 분이다. 잠시 사이를 두고 핸드크림 세트가 카톡 선물로 들어왔다. 선배와 만났을 때, 어머니를 돌보면서 물기에 자주 노출되는 바람에 손바닥이 따가워 피부과에 간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났다. 선배의 깊은 배려가 담긴 선물이다. 손이 아니라 마음을 어루만지는 듯 가슴이 따뜻해졌다.

학창 시절, 선배는 학교에서 소문난 우등생이었다. 중학생 때는 전교 석차 30등까지 게시판에 공고를 했다. 항상 1등에 이름 올리는 선배는 우상과 같았다. 차분하고 단정한 이미지에서 범접 못할 아우라가 느껴졌다. 요즘도 그때 이미지가 살아있지만, 몹시 따뜻하고 순수한 모습이다. 때론 소녀같이 까르르 웃는다. 선배를 만나는 날에는 많이 웃어서 그동안 쌓인 스트레스가 날아가는 기분이다. 사람을 만날 때 마음이 불편해 피곤할 때가 있는데, 선배를 만나면 신나고 이야기가 많아진다. 학창 시절엔 말도 제대로 못 걸었는데, 지금은 친구 같다. 시절인연(時節因緣)이라더니 이제야 마음을 터놓고 이야기 나눌 수 있는 사이가 됐다. 선배가 내게 위안이 되듯 나도 한 사람의 마음이라도 위무할 수 있는 글을 써야겠지. 활짝 핀 백일홍에서 선배의 향기가 난다. 꽃이 피면 100일을 간다는, 선배를 닮은 꽃 옆에서 사진을 찍었다. 백곡재 마루에 앉아 한참 배롱나무를 바라봤다. 나뭇가지의 단단한 기품 위에 빨간 속살 드러낸 백일홍이 내 마음을 훔쳤다.

남편이 내 옆구리를 툭툭 쳤다. 그제야 일어나 마당을 거닐었다. 남편과 갈맷빛 은행나무 아래에서 머물렀다. 푸릇푸릇한 기운에 몸과 맘이 싱그러워지는 듯했다. 여름 은행나무를 가까이에서 느껴본 적이 별로 없었는데 오래된 나무 아래에 서니 상서로운 기운이 온몸을 휘감았다. 백곡재에서 울려 퍼지는 옛 선비의 글 읽는 소리가 잎사귀 사이로 스민다. 나무 둥치를 자세히 살피는 남편의 모습이 정겹다. 매미울음 소리가 들린다. 그 소리는 은행나무를 흔들고 내 마음을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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