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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임조 동화작가
정임조 동화작가

성큼 가을이 왔다. 성큼이라는 말을 입으로 달삭거려 본다. 시원시원하고 단정하다. 토요일마다 아파트 인근에 전을 펼치는 꽃 할아버지는 어느새 국화분을 펼쳐 놓았다. 마트에 다녀 오자마자 뒷베란다 쪽 작은 창문을 열고 여름 새 무성하게 자란 나뭇잎이 손에 잡힐까 까치발을 하고 팔을 뻗어본다. 


 이제 진짜 여름 옷을 정리해야겠어. 이불은 도타운 것으로 바꾸고. 샌들을 더 신는다는 건 주책스런 일이겠지. 안녕! 여름과 단단히 헤어질 결심을 하는순간! 김치 냉장고에 든 복숭아가 떠오른다. 가을에 복숭아는 어쩐지 어울리지 않는다. 그래도 복숭아를 생각하면 마음에 발그레한 보름달이 뜬다.


 어릴 적 고향집에 감나무 네 그루와 큰 대추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그래서 풍족하게 먹을 수 있는 과일이 감과 대추였다. 사과나 배는 명절 때나 먹을 수 있는 호사스런 것이었다. 중학교 여름 방학이었을 것이다. 엄마가 보리쌀을 머리에 이고 무작정 내 손을 잡고 길을 나섰다. 비지땀을 흘리며 찾아간 곳은 복숭아 밭이었다. 엄마는 보리쌀을 복숭아와 바꾸었다. 엄마가 복숭아가 먹고 싶었는지, 가족 중 누가 복숭아 타령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빠듯한 살림인데도 엄마는 복숭아를 양철 대야가 출렁거릴 만큼 샀다. 그 많은 복숭아를 누가, 언제 다 먹었는지 기억나지 않고 그 향과 맛이 또렷하게 저장되었다.   


 내 돈으로 먹고 싶을 것을 마음껏 사먹을 수 있는 나이가 되었을 땐 세상에 복숭아보다 맛있는 것이 너무 많아서 복숭아 같은 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복숭아로 유명한 경북 영덕이 고향인 직장 동료가 여름 휴가를 보내고 복숭아를 한 박스 들고 왔다. 중학생 때 먹었던 그 맛이었다. '저는 과일 중에 복숭아를 제일 좋아해요.' 나도 모르게 이렇게 말해 버렸다. 


 객지생활을 하던 때, 자취집 가까이에 시장이 있었다. 여름이 오면 퇴근길에 꼭 시장 끝까지 걸어가 복숭아가 얼마나 굵고 단단해졌는지 살피곤 했다. '더 굵고 마음에 드는 복숭아가 나오면 사리라.' 이렇게 우스꽝스러운 욕심을 부리며 시장을 오르락 내리락하다가 그만 여름이 다가도록 복숭아 한 알 먹지 못한 때도 있었다. 어떤 계기가 있었던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복숭아에 대한 눈이 높아져 있었다. 이후로도 다른 과일은 몰라도 복숭아만큼은 최상급으로 먹겠다는 고집이 꺾이지 않았다.  


 지인 중에 전원 생활을 하며 마당에 심은 나무에서 딴 과일을 나눠주기 좋아하는 이가 있다. 그녀는 내가 복숭아를 좋아하는 걸 알고 올 여름에는 몇 개 열리지 않는 복숭아를 기어이 선물로 주었다. 아주 못 생기고 작아서 핏, 웃음이 절로 나왔다. 며칠 냉장고에 봉지 째 넣어뒀다가 그래도 이건 예의가 아니지 싶어 맛보았다가 깜짝 놀랐다. 어찌나 옴팡지게 단단하고 달콤한지 굵고 잘 생긴 것만 찾던 복숭아 자존심이 와르르 무너졌다.  


 여름이 한창일 무렵 큰맘 먹고 농산물시장에 복숭아를 사러 갔다. 이맘 때면 복숭아가 익을 대로 익었겠지 싶었다. 복숭아를 먹어줘야 할 무렵이었다. 단골가게 주인 이모와 이런 저런 인사를 나누고 복숭아를 샀다. 다른 과일 몇 가지도 샀다. 여기까지는 좋았는데 아파트 주차장에 들어설 무렵 과일 값을 제대로 치르지 않았다는 것을 알았다. 복숭아 값을 계산하지 않는 게 분명했다. 


 다시 돌아가기에는 날이 너무 더웠다. 좀 멀라 와버렸고…  다음번에 줘야겠다는 생각으로 집으로 들어갔다. 보름 뒤 쯤 농산물시장에 갈 일이 있었다. 과일가게에 등 넓은 젊은 남자가 상자를 정리하고 있었다. 그새 주인이 바꼈다는 것을 금세 알게 됐다. 과일값을 먼젓번 주인에게 전해 달라고 부탁했지만 새주인은 한사코 거부했다. 나 자신에게 부끄러워서 얼른 차를 돌려 집으로 왔다. 


 생각해 보니 씨알 굵은 복숭아도, 퍼주기 좋아하는 그녀의 복숭아 봉지도, 전해 주지 못한 복숭아 값도 전부 내가 이 여름에 진 빚이다. 돌아보면 일 년 열두 달 많고 많은 빚으로 내가 산다. 감이 더 물컹해지기 전에, 대추알이 더 단단해지기 전에, 벼이삭이 샛노렇게  서걱이기 전에 여름에 진 빚, 이 가을 누구에게도 갚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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