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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랑이논’에 가을이 물들다...이상원의 이야기를 담은 풍경 (12)
연화산에서 바라본 울주군 두동면 은편리 황금들녁. ⓒ이상원
연화산에서 바라본 울주군 두동면 은편리 황금들녁 2. ⓒ이상원
경주시 화랑의 언덕에서 바라본 산내면 비지리 가을 들녘. ⓒ이상원
연화산에서 바라본 울주군 두동면 은편리 황금들녁 3. ⓒ이상원
고헌산에서 바라본 울주군 상북면 들녘. ⓒ이상원

계절은 언제나 정직해서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찾아왔다. 들녘에도 가을빛이 물들었다. 특히 다랑이논은 곡선과 황금빛이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유난히 눈길을 끈다. 다랑이논은 비탈진 경사지에 만든 계단식 논을 말한다. 아름답고 평화로운 풍경이지만 그 논을 만든 과정을 생각하면 달리 보이게 된다.

송기숙의 소설, 녹두장군 제5권 ‘하늘배미’ 편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지리산 피아골에 들어서 나눈 대화에서 가난한 자들의 땅에 대한 간절함과 작은 논 하나를 만들기 위한 눈물겨운 과정을 엿볼 수 있다. 

‘5평짜리 논배미 하나 만들려고 5백짐의 돌로 석축을 쌓고, 5백짐의 흙을 채우고, 물길을 내는데 한 달 보름(45일)이 걸린다.’

‘절벽 낭떠러지에 30평의 공중배미 논을 만드는 데는 아버지와 아들 둘이 일을 했어도 2년은 넘게 걸렸을 것이다.’ 

‘한 뼘이라도 농토를 더 늘리려고 돌로만 수직으로 석축을 쌓았고, 석축이 무너지지 않게 밑바닥을 안으로 석 자(약 1m)나 깊게 파서 몇 겹으로 돌을 채우고 위로 올라갈수록 좁아지다가 맨 위에는 한 겹이 되게 했으니 훨씬 많은 노력이 들었다.’

옛날 농부가 일을 하다가 논을 세어보니 논 한 배미가 모자라 아무리 찾아봐도 없기에 그냥 포기하고 집을 가려고 삿갓을 들었더니 그 밑에 한 배미가 있더라는 일화에서 삿갓배미란 이름도 붙여졌다. 그 작디 작은 땅도 간절했다는 얘기다. 배미란 눈두렁으로 경계 지어진 논의 한 구역을 말한다. 

낭떠러지 끝 공중에 떠 있다고 이름 붙여진 ‘공중배미’ 30평이 7개라야 겨우 논 한 마지기가 아닌가! 그 땅에서 생산된 쌀이 예나 지금이나 얼마나 되겠는가. 어디 사라지지도 않을 논배미를 굳이 세어본 이유는 무엇일까. 농부들에게 있어 그 땅과 거기서 나온 곡식은 바로 자기가 낳은 자식과 같이 사랑스럽고 소중했기 때문이다. 밥 한 그릇을 향한 간절한 염원이 불굴의 의지로 그 땅을 일구게 했다. 지도의 등고선처럼, 생선 비늘처럼 겹겹이 산자락을 두르고 있는 다랑이논들이야말로 한 그릇의 밥을 얻기 위한 위대한 노고의 흔적이고 땀과 눈물이 이룬 곡선의 예술이다. 

모양에 따라 사연도 많고 붙여진 이름도 다양하다. 다락논, 다랭이논, 다랑전, 다랑치, 다락배미, 구들장논, 주먹배미, 엉덩이배미, 치마배미, 항아리배미, 우산배미, 하늘배미, 천상배미… 

우리 조상들의 문화 중에서 후손들에게 물려줄만한 가치가 있는 것을 문화유산이라고 하고 농업 분야에서는 농업유산이라고 부른다. 깎아지른 절벽에 만들어진 다랑이논은 긴 인고의 세월과 피눈물 나는 고통을 감내한 산물이라 농업유산으로 충분히 가치가 있고 보존되어야 한다. 다랑이논에 모를 심기 위해 물이 가득 채워질 때 태양의 위치에 따라 형형색색으로 변하는 모습, 곡선으로 둘러싸인 크고 작은 논에 눈 내린 모습 또한 절경이다. 

논은 삶을 지탱하는 바탕이었기에 거기에는 다양한 문화와 사람의 정서가 녹아 있다. 어릴 적 농촌에서 자란 이들은 벼가 여물어갈 때 참새떼 쫓고, 논두렁에서 메뚜기 잡고 봇도랑에서 미꾸라지 잡던 추억이 있다. 벼가 잘 자라 황금 들판이 되면 바라만 보아도 배가 부른 느낌이 든다. 가뭄으로 벼가 자라지 않거나 태풍으로 벼가 쓰러지면 사람의 마음도 타들어간다. 도시에 사는 사람들도 농촌을 보면 평온함을 느낀다. 논을 떠올리면 논에서 일하던 사람들의 모습도 떠오른다. 곰방대 물고 가래 들고 물꼬 보러 다니던 할아버지, 새참을 머리에 이고 논둑을 걸어오던 엄마의 반가운 모습, 여럿이 줄지어 벼베기할 때 일손이 빨라 항상 앞서 나가는 친척 아저씨…..
콤바인이 벼 베기와 탈곡을 순식간에 끝내는 장면에 낫으로 벼를 베던 모습, 두 사람이 발로 밟아 벼를 타작하던 ‘와룡기’(원통이 돌아갈 때 ‘와롱와롱’ 소리가 난다고 붙여진 탈곡기 이름)도 겹쳐진다. 

경제개발이 본격화 되면서 농업의 비중이 감소하고 이농 현상, 농업 생태계 훼손 등이 두드러지고 있다. 도시와 농촌의 격차를 해소하기 위해 농촌지역을 개발하였으나 오히려 농촌자원이 소멸하거나 훼손되는 일이 잦아졌다.

사회·경제적 변화로 인해 논의 면적은 해마다 감소하고 있다. 특히 다랑이논의 경우 평지의 논에 비해 농기계 투입도 어렵고 가용면적도 좁아 쌀 수확량이 낮아 경제적 측면에서 본다면 유지해야 할 실익이 없는 게 현실이다.
식생활의 변화로 쌀 소비량은 계속 감소하고 쌀이 남아돌아 재고는 쌓이고 있다. 다른 물가는 계속 올라도 쌀값은 하락해 농민들의 시름이 깊어지고 있다, 

이상원 사진가 swl5836@naver.com
이상원 사진가 swl5836@naver.com

이제 농업의 공익적 가치에 눈을 돌려야 할 때이다. 논은 식량안보, 환경보존과 자연생태계 유지, 홍수조절, 자연경관 유지, 민족 고유의 전통문화 계승, 지하수 함양 및 오염 저감, 여름철 대기 냉각 효과, 토양 유실 방지, 수질 정화, 대기 정화로 지구온난화 방지 등의 다양한 기능을 한다. 쌀의 생산 공간이라는 인식을 넘어 생물다양성이 풍부한 습지로서의 가치도 국제적으로 인정 받고 있다. 논은 단순한 경제적 계산을 넘어서 환경적으로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가치가 있고, 논의 형태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전체 국민이 혜택을 보고 있는 셈이다. 

다행이 최근 농촌에서 여가 활동을 하려는 사람들이 늘면서 농촌의 유·무형 자원에 대한 사회적 관심이 높아지고 있고, 농업과 농촌이 지니고 있는 다양한 가치가 교육과 관광, 치유와 휴양에 다양한 유형으로 활용되고 있다. 농업의 공익적 가치를 헌법에 담아야 한다는 목소리도 힘을 얻고 있다. 

농촌과 농업을 살리고 함께 잘 살 수 있는 노력과 지혜가 더욱 절실하다. 모두가 관심을 가지고
우리 논에서 생산된 쌀로 따뜻한 밥 지어 먹고, 국산 농산물의 소비를 적극 실천하는 것이 지속 가능한 농업·농촌을 유지하고 농업의 공익적 가치에 동참하는 첫걸음이 아닐까 싶다.

그리하여 다랑이논도 길이 보존되어 그 아름다움을 언제까지나 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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