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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련 동화작가
장세련 동화작가

마당의 나무를 옮겨 심은 적이 있다. 그 나무가 살 만한 토양이 아니거나 뿌리가 자랄 수 있는 공간이 안 되어서다. 옮겨 심은 나무는 얼마간 세세히 살펴야 한다. 나무의 적응을 위한 몸살을 달래기 위해서다. 대부분의 나무들은 며칠은 잎이 시들시들해진다. 수피가 거칠거칠해지는 느낌을 감추지 않는 나무도 있다. 마치 낯선 자리에서 경계심을 나타내는 까칠한 소녀 같달까, 아무려나 새로운 자리에 뿌리 내리기가 그만큼 힘든 일인 걸 알 수 있다. 사람의 입장에서만 봐서일까. 나무는 사람에 비하면 감정도 표정도 단순하다. 그런 나무도 이러할진대 하물며 사람임에랴. 

 <비행기에서 쓴 비밀 쪽지>(임정진/그린애플)를 읽으면서 마당의 나무들까지 생각하게 되었다. 책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살 자리를 옮긴 입양아들이다. 두껍지 않은 책에 여섯 편의 동화로 소개된 입양아들의 이야기가 모두 무겁지만은 않다. 가볍게 다루어서가 아니다. 개중에는 제대로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도 있어서지만 부끄러운 건 사실이다. 눈물겨운 고난만 겪은 건 아니구나 싶으면서도, 이국땅에서 살아내기 얼마나 힘들었을까 싶어서다. 낯선 토양에 새로이 뿌리내린 한 그루의 나무를 떠올리지 않을 수가 없다. 모습부터 다른 사람들의 틈바구니에서 겪었을 정체성의 혼란이 안쓰럽다. 잘 가꿔진 화단의 강아지풀 같은 소외감은 또 어땠을까? 

 살던 환경과 전혀 다른 곳이라면 낯섦에 여간 당황스럽지 않을 것 같다. 특히 모국어를 배운 뒤 입양이 되면 적응이 더 힘들 것 같다. 이미 모국어 구사에 능통한 만큼 입양된 나라의 말을 배워야 한다는 건 어쩌면 가장 큰 고난이었을지도 모른다. 그건 일제 강점기를 살아낸 조상들의 이야기에서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태어난 땅에 살면서도 생경한 일본어를 배우는 건 여간한 고역이 아니었단다. 딱히 일제에 대한 반감 때문이라기보다 이미 익힌 지 오래인 말을 바꿔써야 하는 일이 정말 힘들었단다. 

 '서 있는 아이' 레나의 혼란과 갈등이 저절로 공감된다. 양부모의 차를 타고 공항에서 집까지 가면서도 레나는 의자에 앉지 못한다. 말이 통하지 않으니 양부모의 다정함조차 이해하지 못하는 아이. 동희에서 레나로 바뀐 사실도 깨닫지 못한 채 불안감에 휩싸인 모습이 애처롭다. '나는 어디로 가나?'를 중얼거리는 제프의 정체성 혼란도 가슴을 저민다. 자신을 입양한 이유가 정부로부터 받는 지원금 때문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 제프의 마음에서 큰 구멍을 느낀 것은 나뿐이었을까? 우리하고 저린 느낌으로 읽히는 묵직한 이야기들.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찾으며 갈등과 아픔을 딛고 선 주인공들에게 자꾸 미안해진다. 정작 뿌리를 찾고 싶어도 친부모가 원치 않아서 바람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에 함께 절망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표제작인 '비행기에서 쓴 비밀 쪽지'는 그나마 잘 자란 입양아의 이야기다. 아홉 살에 프랑스로 입양된 마티아스는 자신의 뿌리를 잊지 않으려고 입양 차 탔던 비행기에서 쪽지를 쓴다. 자신이 아빠가 된 후에 그 쪽지를 발견하고 친모를 찾고 싶어하는 바람이 희망적이어서 다행이다. 입양이 되기 전에 한국에서 먹었던 수제비를 먹고 싶어하는 청년 막심의 이야기 '귀스프를 아시나요?'도 비슷하다. “그 수프에는 희고 말랑말랑한 귀가 많이 들어갔어요."

 언뜻 끔찍한 표현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하도 가난해서 날마다 수제비를 먹었을 거라는 설명에 막심은 고개를 끄덕인다. 지금은 누구나 별식으로 여기는 수제비다. 그것이 가난한 이들의 주식이었던 시절, 먹는 입이라도 덜자는 생각보다는 조금이라도 잘 먹고 살기를 바라며 낯선 땅으로 보냈을 친모의 마음을 이해하는 막심의 모습이 눈물겹다.

 해외 입양아가 16만 7천여 명이라는 작가의 말에 책임감을 느낀다. 유난히 핏줄을 따지는 관습이 어린아이들을 남의 나라로 내몰았구나, 싶어 부끄럽기도 하다. 나도 25년 전 딸을 입양하고 싶어서 안달했던 기억이 있다. 핏줄을 따지는 시부모의 반대로 포기했던 마음이 새삼 미안하다. 내 손녀로 인정하지 못하는 분위기에서 아이가 제대로 자라지 못할 거라는 생각에 오랜 갈등을 접은 것이다. 

 우리는 유난히 핏줄을 고집한다. 넓게는 단군의 자손 어쩌고 하면서 단일민족이라는 말에 자부심을 갖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같은 핏줄인 어린아이들을 남의 나라로 보내는 부끄러움을 이제는 멈춰야 한다. 우리나라 급격한 인구감소는 국내 입양을 늘려야 하는 이유다. 그것이 마음의 빚을 갚을 차례라는 작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보니 국내 입양이야말로 진정한 핏줄보존이 아닌가 싶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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