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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구대의 반고서원 유허비에 있는 포은대 영모비, 포은대 실록비, 반고서원 유허비실기(왼쪽 부터) 등 울산시 유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된 3개 비석의 모습.
반구대의 반고서원 유허비에 있는 포은대 영모비, 포은대 실록비, 반고서원 유허비실기(왼쪽 부터) 등 울산시 유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된 3개 비석의 모습.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마을 입구에 들어서면 고즈넉한 고택이 먼저 눈에 띈다. 그 앞에 유유히 흐르는 대곡천 건너편으로 고개를 돌리면 야트막한 야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이 언덕은 동쪽 하늘을 향해 한 마리의 거북이가 엎드려 있는 형상이라 해서 반구대라 불린다.

# 울산시 유형문화재 '반고서원 유허비'
  그 반구대를 자세히 살펴보면 짙은 녹음에 가려진 아담한 붉은 비각을 발견할 수 있다. 바로 반고서원 유허비각이다. 삼각지 길가에 놓인 평상에 앉아 푸른 단풍나무 사이로 비각을 보면 더 또렷하게 드러난다. 비각 안에는 3개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고려 말 충신 포은 정몽주를 기리는 비석들이다. 포은 정몽주가 국정을 농단하던 실권자들의 외교정책을 따르지 않아 언양까지 귀양을 오게 됐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이곳에서 힘겨운 나날을 보내던 포은은 세시 명절 중 하나인 음력 9월 9일 중양절(重陽節)에 반구대를 찾았다. 절기 풍속에 따라 '중양절 감회'라는 시를 남겼다. 아마도 국화주도 한 잔 곁들이며 시름을 달랬으리라 상상된다. 

높은 학덕으로 온나라 명성 자자
1년여 귀양 끝내고 떠난 아쉬움 
비각과 '포은대영모비'로 기려

  온 나라에 높은 학덕으로 명성이 자자했던 포은을 볼 수 있다는 것은 언양 사람들에게는 꿈 같은 일이었다. 그래서인지 그가 떠난 후 언양사람들은 그를 오래도록 기리기 위해 반구대 인근 하천 바위에 포은대(圃隱臺)라는 석각을 세기며 포은대라 불렀다. 이후 울산 인근에 부임하는 목관과 시인, 묵객들이 줄을 이어 포은대를 찾아서 바위에 새겨진 석각 포은대 옆에 자신의 이름을 세기고 시도 남겼다. 당대의 핫플레이스가 된 셈이다. 고고한 선비의 기상을 상징하는 학의 석각 2점도 남아 있다고 하나 한 점만 뚜렷이 보인다. 

반구서원에 모셔진 포은 정몽주, 회재 이언적, 한강 정구의 영정. (왼쪽부터)
반구서원에 모셔진 포은 정몽주, 회재 이언적, 한강 정구의 영정. (왼쪽부터)

 언양 유림은 단지 핫플레이스에서 머무는 것이 안타까웠는지 서원을 짓기로 했다. 포은대를 찾아 시를 남기며 반구대와 특별한 인연을 맺은 포은 등 3인의 위패를 모시고 반구서원이라 칭했다. 훗날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문을 닫게 되자 아쉬운 마음을 담아 차례로 비석이 세워졌다. 포은대 영모비, 포은대 실록비, 반고서원 유허비실기 등 포은과 관련된 3개의 비석이 그것이다. 울산시는 이를 반고서원 유허비라 칭하고 울산시 유형문화재 제13호로 지정했다. 

반구서원 앞뜰에 배롱나무 꽃이 활짝 피어 있다.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반구서원 앞뜰에 배롱나무 꽃이 활짝 피어 있다.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 반구대 인연 3인 위패 모신 '반구서원'
  하천을 건너 반고서원 유허비로 이르는 길이 있다고 마을주민들이 말했으나 아쉽게도 찾지 못했다. 한여름 무릎 위까지 빠지는 구곡하천의 빠른 물길을 건너는 일은 그리 쉽지 않았다. 육탄돌격의 심정으로 신발, 양말을 벗고 바지도 접어 올려 빠른 물살과 물길 바닥 자갈에서 중심을 잃지 않으려 애쓰며 무사히 건넜다. 비각 아래에서 언덕을 오르는 길은 높지는 않지만 가파르고 하천 습기에 젖은 땅에 발이 빠지고 반팔 소매에 가시덩굴 더미를 헤쳐나가야만 했다. 

 그렇게 오른 곳이 반구대 중심부인 반고서원 유허비가 들어선 비각이다. 포은 선생이 이곳 대곡천 구곡절경에 취해 한시를 지었다는 감회의 장소라는 생각에 오던 길 고생이 싹 사라졌다. 울산공업도시 건설이 한창이던 1960년 초 사연댐이 들어서고 1965년에 반구마을 입구에 반고서원에서 반구서원이라는 이름으로 고쳐 세워진 서원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 많은 유학자들 이상과 꿈 숨쉬는 곳
  반구서원에 위패가 모셔진 3인 중 한 명인 회재 이언적은 영남학파 성리학 선구자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그가 경상도관찰사로 있을 때 반구대를 찾아 절경에 감탄하며 시를 읊었다고 전해지나 행적에 대해서는 기록으로 남아 있지 않다. 또 한강 정구는 퇴계와 남명 학풍을 넘나들었던 조선 중기 문신으로 독특한 인물이었다. 그가 남긴 편지글에서 '반구대에 머물며 살고 싶다'는 뜻의 문구가 있었다 전하나 이 또한 기록으로는 남아있지 않다. 반고(般皐, 반구대의 이전 이름)라는 명칭도 한강이 남긴 편지글 '언덕에 집을 지어 은거한다.(고반재아 考槃在阿)'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대곡천은 국보인 2개의 암각화뿐만 아니라 구곡문화를 가꾸던 유학자들의 이상과 꿈이 숨쉬는 곳이며 울산의 젖줄 태화강의 상류이다. 고래를 쫓으며 풍요를 기원한 선사인과 삼국통일을 염원한 고대국가 신라인, 그리고 조선시대 성리학의 이상을 이루려던 선비들의 발자취와 정신이 깃든 소중한 곳이다. 좁다란 길을 따라 오가는 전기차를 보며 소중한 유산이 오래도록 보존되고 이어지길 간절히 기원해 본다.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반구대(포은대)의 모습.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반구대(포은대)의 모습은 한 마리의 거북이가 엎드려 있는 형상이다.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반고서원 유허비( 槃皐書院 遺墟碑)
울산 유형문화재 제13호

  유허비란 한 인물의 자취를 밝혀 후세에 알리고자 세운 비석이다. 반고서원 유허비는 포은 정몽주를 기리기 위해 세운 반고서원이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문을 닫게 되자 이를 안타깝게 여긴 언양 유림에서 세운 3개의 비(포은대 영모비, 포은대 실록비, 반고서원 유허비 실기)가 있는 곳이다. 
 
반구서원 (盤龜書院) 
  조선 후기 정몽주 등 3인의 선현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서원으로 1712년(숙종 38) 언양지역 사림들이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한강(寒岡) 정구(鄭逑) 등 3현을 제향하기 위해 언양의 반구대 아래에 창건한 서원이다. 1871년(고종 8)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됐다. 현재의 서원은 언양읍 대곡천 하천을 끼고 반구대와 인연을 맺은 3현을 기리기 위해 1712년 언양지역 사림(士林)에서 지은 것이다. 정구가 쓴 편지에서 "언덕에 집을 지어 은거한다.(고반재아 考槃在阿)"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다. 반고서원은 후일 '반구서원(盤龜書院)'으로 개칭됐다.

반구대 입구에 있는 고택 집청정 아래 하천에 있는 반구대 석각. 류미숙씨 제공
반구대 입구에서 마주치는 고택 집청정 아래 하천 옆에 있는 반구대 석각. 류미숙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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