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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원 시조시인
이서원 시조시인

귀이천목(貴耳賤目), 귀는 귀하게 여기고, 눈은 천하게 여기라는 뜻이다. 사람이 가진 오감 중에서 듣지 못해도 볼 수 있다면 그나마 다행 아닌가 싶었는데, 그것은 나의 편협한 사고에서 오는 생각이었다. 


 언젠가 시각장애인 봉사에 간 적이 있었다. 나와 짝이 된 여성 한 분과 바닷가를 거닐었다. 신발을 벗어들고 보드라운 모래를 함께 밟았다. 푸른 파도가 넘실넘실 우리 발을 적셨다. 온 촉각을 발등으로 가져간 그는 바닷물이 닿는 것에도 아이처럼 좋아했다. 미역 냄새를 맡으며 한없이 순순해진 그녀! 평생 처음 바닷가를 걷는다며 보드라운 모래 한 줌을 오래도록 만지작거렸다. 


 모래사장에 나란히 앉았다. 그는 담담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파도처럼 풀어내었다. 대엿 살 적까지 그나마 사물의 구분 정도는 할 수 있었는데, 어느 날부터 아주 희미하게 보이던 것조차 서서히 자기 눈을 깜깜하게 덮어오기 시작하더란다. 그렇게 파랗던 하늘과 마당의 감나무 한 그루조차 보이지 않을 때 세상은 그야말로 지옥 같더라고. 그렇게 수십 년을 집안에서 보냈지만, 드디어 오늘 용기 내어 이 바닷가를 거닐 수 있었다며 고마워했다. 이제는 보이지 않아도 미각, 촉각을 통해서 자연의 일부를 알아낼 수 있다며 애써 나를 위로 했다. 


 아마도 나는 분명히 보이는 것에 연연해서 보이지 않는 것을 못 믿으며 지내온 게 틀림 없었다. 대부분 사람은 눈앞에서 직접 보는 것만 믿는다. 그러나 보지 않고 믿는 것은, 더 큰 용기며 지혜가 아닐까 싶다. 


 조선 후기, 서로를 끔찍이 위하며 벗으로 지낸 문우였지만 끝내 갈라설 수밖에 없었던 두 사람이 있다. 바로 창애 유한준(1732~1811)과 연암 박지원(1737~1805)이다. 서로 오랜 지기였지만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라 글 쓰는 법에서 서로 갈라서고 말았다. 창애의 문장 또한 그 시대를 풍미했지만 연암은 단호하게 그의 글은 고문이라 치부했다. 서로 인식이 달랐던 것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논리를 주장하는 연암이었다면, 창애는 끝까지 자기 방식의 옛글에서 그 해답을 찾으려 했다고 볼 수 있겠다. 


 어느 날 창애가 쓴 글을 아들을 통해 연암에게 보여주자 연암은 아래와 같이 답장을 써 그의 아들에게 쥐어 보냈다.   


 화담(서경덕)이 밖에 나갔다가 제 집을 잃어버리고 길가에서 우는 자를 만나서 "너는 어찌 우느냐" 했더니 대답이 "저는 다섯 살 적에 소경이 되었는데 지금 20년이 되었습니다. 아침나절에 밖을 나왔다가 갑자기 천지 만물을 환하게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기뻐서 집으로 돌아가려는데, 밭둑에 갈림길이 많고 대문들이 서로 같아서 제 집을 구분할 도리가 없습니다. 그래서 울고 있습니다." 하기에, 선생이 "내가 너에게 돌아갈 방도를 가르쳐 주마 네 눈을 도로 감으면 바로 네 집이 나올 것이다." 했습니다. 


 여기에 숨은 깊은 뜻은 무엇일까. 그것은 도로 눈을 감으라는 반어적 답에 있다. 도로 눈을 감고 예전처럼 왔던 길을 돌아가 집에 무사히 닿기만 한다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 그 집에서부터 새로운 출발을 한다면 분명 지금 온 골목도 인지될 것이다. 


 연암은 시대가 변하면 글도 변해야 한다는 뜻을 분명하게 가감 없이 쓴 것이다. 우리 삶도 이와 같다. 늘 그대로 옛것만 따른다면 진일보한 미래의 삶이 우리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집으로 돌아가기만 하면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지금까지 왔던 길까지만 잠시 불편해도 눈을 감고 지팡이에 의지하기만 한다면 그때부터 새로운 세상이 기다려줄 것이다. "도로 눈을 감으시오!" 이 역설의 의미를 안다면 세상은 가일층 달라진다.


 지금까지 믿고 걸어왔던 어둠을 내려놓고 새 세상을 만날 수 있는 준비를 해야 한다. 눈을 감고 믿지 못했던 것들로부터 아름다운 결별을 선언하자. 다시 눈을 뜬다면 이전에 믿었던 규율과 법칙과 관습과 인습을 모조리 뒤엎을 수 있다. 그래서 '법고창신(法古創新)'이라 했던가. 옛것을 따르되 새로운 것을 창조해내는 아름다운 미래를 그려보고 싶다.


 정치 일번가 여의도는 무슨 격투기 장소인 양 여야가 한치 양보 없는 혈투로 치닫고 있다. 그러나 믿는다. 저 너머에 어둠을 받아들이는 충만한 소통의 우주가 기다리고 있음을. 그것이 이 땅을 지금까지 지탱해온 힘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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