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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저 길을 10여 년 다녔다.
자전거에 하얀 1말짜리 술통 4~5개씩을 걸고, 아침이면 어김없이 도가로 향했다.막걸리를 말 통으로 받아와 되로 파는 마을의 유일한 공판장이 우리 집이었다. 
모내기나 벼 베기 철이 되면 아버지의는 아침이 아닌 낮에도 술도가를 향하곤 했다. 일꾼들의 참이나, 반주를 논으로 직접 배달했다.
 
아버지의 하루는 그렇게 빈 통을 덜그럭거리며 도가로 향하는 게 시작이었다. 자전거는 굵은 바퀴와 철근으로 만든 짐받이가 달려있는 짐 자전거였다. 어린 내가 타기엔 너무 높았고, 크고 무거웠다. 그래도 프레임 사이로 다리를 넣어 가위치기로 곧잘 탔지만, 뒤에서 보면 한쪽으로 넘어간 듯 기울어진 자전거에 매달린 꼴이라 늘 어머니의 걱정을 샀다.
가끔 아버지를 따라 도가에 가면 만수 아재는 십 원짜리 풀빵을 사주셨고, 짐칸에 앉아 풀빵을 먹으며 돌아오는 길은 달달했다. 뭉게구름과 풀벌레 소리가 황금 들녘 위로 그림처럼 흘러갔다.
 
가을 추수로 바쁜 어느 해 가을, 아버지는 몸살로 앓아누웠고 막걸리를 가져오지 못하는 날이 계속됐다. 
나는 막걸리 빈 말 통 하나를 걸고 뚝방길을 달렸다.  
만수 아재는 깜짝 놀라며 
"니가 어찌 왔노?"
"아부지가 편찮으셔서…"
"니가 할 수 있겠나?"
"안 가겠는교…천천히 가지뭐요"
덩치보다 큰 자전거에 막걸리 한 말을 옆에 건 무게는 만만치 않았다.
위태위태했지만 가까스로 중심을 유지하면서 돌아오는 길, 허벅지가 터질듯할 즈음에야 뚝방 위로 올라올 수 있었다. 온몸이 땀으로 흥건했다. 힘들어도 멈출 수 없었다. 서는 순간 넘어질 것이고 세우지 못해 출발하지 못할 것이었다.
집 앞에 도착했을 즈음 기진맥진, 자전거는 중심을 잃고 쓰러졌고 튕겨 나간 막걸리 통이 공판장 앞 도랑으로 굴러떨어졌다. 돌에 찍힌 구멍으로 막걸리가 샘물처럼 새 나왔다. 곳곳에 상처만 남은 나의 첫 배달은 호된 꾸지람과 밑지는 장사로 마무리됐다. 

아버지가 삶의 무게를 지고 오가던 그 길은 이제 둘레길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수십 년 전 뚝방 아래로 새 길이 생기면서 잊힌 곳이 됐지만, 되살아난 길 위를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가볍다. 누군가에게는 치열한 삶의 길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여유로운 낭만의 길이 됐다. 

같은 공간에서 느끼는 다른 시간의 낯섦에 40여 년을 거슬러 그리움으로 걷는다. 
 글·사진=김정규기자 kjk@ulsanpress.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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