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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최대 금동불상인 장육존상 상상도의 모습. 장육존상은 높이 약 5.5m(1장6척), 무게 5.8톤(3만5,007근)으로 추정되며 1982년 출토된 장육존상 불두상의 머리 조각만이 유일한 유물로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장육존상 삼존불 좌우에는 십대 제자상 5기씩 전체 10기가 배치된 것으로 보고 있다. 출처=경주 황룡사역사문화관
신라 최대 금동불상인 장육삼존상 상상도의 모습. 장육삼존불은 높이 약 5.5m(1장6척), 무게 21톤(3만5,007근)으로 추정되며 1982년 출토된 장육존상 불두상의 머리 조각만이 유일한 유물로 그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장육존상 삼존불 좌우에는 십대 제자상이 좌.우 5기씩 전체 10기가 배치된 것으로 보고 있다. 출처=경주 황룡사역사문화관

# 아소카왕이 띄운 황철 실은 배 신라에 닿아 
  573년 음력 2월 신라 진흥왕때 서라벌 남쪽 하곡현 사포(絲浦·울산 중구 반구동 일대) 앞바다에 정체를 알 수 없는 커다란 배가 나타났다. 배 안을 살펴보니 사람은 없고 만들다만 부처·보살상의 형상과 함께 문서만 있었다. 이 문서에는 서축국(西竺國·인도)의 아소카왕(Asoka·아육왕 阿育王)이 황철 5만7,000근과 황금 3만푼을 모아 석가모니 금동불상을 만들려다 매번 실패해 여러 배에 나눠 실어 보내니 누군가 이 불상을 완성하기를 기원한다고 적혀 있었다.  

  아소카왕은 기원전 250년경 고대 인도 마우리아왕조의 제3대 왕으로 이복형제 100여명을 죽이고 왕좌에 올라 나라를 피로 물들이고 영토를 넓히며 인도의 첫 통일 제국을 이뤘다. 정복군주는 뒤늦게 깨달음을 얻어 칼을 내리고 불교에 귀의해 나라를 안정시켰다. 그리고 통치 이념을 새겨 넣은 돌기둥을 나라 곳곳에 높게 세우고 기둥 위에는 사자상을 올렸다.  

울산시 동구 동부동 마골산에 있는 동축사(東竺寺)의 모습.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울산시 동구 동부동 마골산에 있는 동축사(東竺寺) 삼층석탑(울산시 유형문화재 11호)과 사찰의 모습. 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 동축사 짓고 배에 같이 실려온 삼존불 안치
  불교에 기반을 둔 정치 이상을 위해 대형 불상을 만들려다 실패한 아소카왕은 완성하지 못한 불상과 황철·황금을 실은 배를 띄워 바다로 보냈다. 그 배가 수백 년간 항해 끝에 신라에 이르렀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은 정말 믿기 힘든 이야기다. 진흥왕은 배가 도착한 사포 인근 동쪽의 마골산(麻骨山·울산 동구 동부동)에 절을 지어 배에 있던 모형 불상을 잠시 모시고 배에 실린 황철과 황금은 서라벌로 가져와 당대에 가장 큰 초대형 불상 제작을 시작했다. 미완성 불상을 안치한 절을 인도 서축국에 대응해 동축사(東竺寺)라 이름 지었다.

  그리고 서라벌에서 서축국의 황철·황금으로 만들어진 거대한 불상의 높이는 무려 1장 6척(약 5m)에 이르렀기에 불상을 장육존상(丈六尊像)이라 부르며 왕실사찰 황룡사 금당에 안치했다. 진흥왕은 울산과 인연이 이미 깊은 인물이다. 어린 손세자 시절 공주이자 세자비 지위에 있는 모친과 왕후였던 외할머니와 천전리 각석 일대에 나들이 나온 흔적이 암각화의 각석과 그림으로 남아 있다. 

동구 마골산의 빼어난 기암괴석.
동구 마골산의 빼어난 기암괴석.김동균기자 justgo999@ulsanpress.net

# 황철은 경주로 옮겨 황룡사의 장육존상 주조
  아소카왕과 같이 전륜성왕(轉輪聖王)을 꿈꾼 진흥왕은 두 아들의 이름도 동륜(銅輪), 사륜(舍輪)으로 짓고 삼한 통일의 대업에 근접했던 첫 인물이다. 고구려·백제를 밀어내고 삼한의 최남단 변방에 고립되어 있다 영토를 확장해 한강 하류까지 차지하면서 당나라로 향하는 항해 기지를 확보하고 대륙과 문물 교류의 물꼬를 열었다. 이에 학계에서는 당시 신라가 수도 서라벌과 가장 빠르게 물길이 닿는 울산 바닷가 사포에도 국제무역항이 있었을 가능성을 추론하고 있으며 이를 뒷받침할만한 흔적이 여러 유적으로 남아 있다. 

  진흥왕이 부친 법흥왕이 굴복시킨 금관가야 세력과 문화를 제대로 흡수하고 선대 부터 다져진 왕권으로 통일신라 멸망의 길로 이끈 육두품 신분제를 타파해 개방형 지도층을 구축했으면 증손자 대에 굴욕적이고 뼈 아픈 삼한통일을 겪지 않고 온전한 통일을 앞당겨 이뤘을지 모를 일이다. 안타깝게도 자식 농사 마저 실패해 왕실에 패륜이 거듭되고 왕의 홀대를 받던 왕후 마저 궁궐을 떠나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다. 결국 신라의 정복군주 진흥왕도 말년에 둘째 아들에게 옥좌를 물려주고 스스로 절로 들어가 스님이 되었다.

  이듬해 장육존상 불상에서 눈물이 발꿈치까지 흘러 내려 땅을 적셨는데 이는 신라의 국력을 키운 진흥왕이 세상을 떠날 조짐이었다. 이후 불상이 땀을 흘리면 나라에 불행한 일이 일어났다고 한다. 초대형 불상 장륙존상은 손자 진평왕이 하늘에 받은 옥대와 황룡사 구층목탑과 함께 '신라의 3보'라 불리며 오래도록 나라를 지켰다. 

김홍도의 죽하맹호도(竹下猛虎圖·개인 소장). 출처=국립중앙박물관
김홍도의 죽하맹호도(竹下猛虎圖·개인 소장). 출처=국립중앙박물관

  동구 서부동 남목초등학교 정문 앞 사거리에서 왼쪽 길로 꺾어 들면 마골산의 초입길이 보인다. 그 산 길을 따라 돌계단을 힘겹게 오르면 동축사 삼층석탑(울산시 유형문화재 제11호)을 감싸고 있는 아담한 절이 보인다. 1975년 현대그룹 창업주 고 정주영 회장의 시주로 중창된 사찰이다.

  사찰을 둘러싼 마골산은 기암괴석이 빼어나고 동해를 굽어 보며 솟아있다. 조선 초기 농사가 권장되자 농토를 넓히기 위해 평지가 아닌 산지까지 개간하기 시작했다. 인간과 호랑이의 영역이 가까워지면서 호환(虎患)을 당하는 사례가 늘었다. 심지어 호피(虎皮)공납제가 생길 정도로 한반도에 호랑이가 흔해서 '1년의 반은 사람이 호랑이 사냥을 하고 나머지 반은 호랑이가 사람을 잡아 먹었다'는 말이 생겨날 정도로 호랑이와 관련된 이야기가 많은 호담국(虎談國) 이었다. 마골산에는 조선시대에 나라에서 말을 키우는 목장이 있었는데 호랑이 자주 출몰했던 곳이다.

  정조의 초상화를 그린 어진화사 단원 김홍도가 경상좌도 울산 감목관(監牧官)으로 발령 받아 잠시 남목마성 일대에 머물렀다. 이때 단원은 착호갑사의 호랑이 사냥길을 따라 나서 살아 있는 호랑이를 처음 접하고 그 생생한 느낌을 화폭에 옮긴 2점의 그림이 죽하맹호도와 송하맹호도(삼성미술관 리움 소장)이다.  글·사진=김동균기자 justgo999@

※ 주변 가볼만한 곳
  동축사를 둘러보고 마골산에 내려와 인근 남목시장에 들리면 다양한 먹거리를 만날수 있고 주전 바닷가와 연결된 도로는 드라이브 코스로도 널리 알려져 있어 절정에 이른 단풍도 즐길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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