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빗방울

문송산

동그라미 저리도 그려대는 까닭은
변변한 실반지 하나
끼워주지 못한 게 못내 걸려서다

동그라미 저리도 지워대는 까닭은 
변변한 실반지 하나 
받아보지 못한 게 못내 섧어서다

제 손으로 부쉈다가 다시 그리는 
집착의 수레바퀴
차마 하늘도 외면하지 못해

수수만 개 실반지 언약
속삭이는 사랑
동그라미 그려대기 지친 빗방울

△문송산: 1981~1983년 '시문학' 2회 추천완료 등단(문덕수, 이석 추천). 시집 '보이는 것은 모두 젖는다' '주치의 A씨와의 관계' '바람의 향기' '편지'.
 

김감우 시인
김감우 시인

발상이 재미있다. 실반지를 그리고 다시 지우기를 반복하는 '비 오는 날의 단상'이 반짝인다. 말없이 바닥을 바라보고 있을 시인의 뒷모습이 보인다. 바닥을 본다는 것은 바람이 없었다는 뜻이다. 빗소리가 들린다. 가을비였을까? 토닥토닥 곱게 비가 내리는 날이다. 걱정할 정도의 폭우도 아닌.
 시에서 쓸쓸한 관조와 맑은 동심이 함께 보인다. 조마조마한 순수가 보이고 동시에 장삼이사의 안타깝고 투박한 정이 진하게 보인다. 

 아리지 않은 사랑이 있을까. 변변한 실반지 하나 끼워주지 못한 게 '못내 걸려서' 빗방울로 내린 저 사랑은 아직 진행형이다. 진행형이기 때문에 빠르게 사라진다. 그려내기 바쁘게 동그라미 다시 지우는 저 사랑도 아직 돌아가는 집착의 수레바퀴다. 사라지기 때문에 더 애틋한 수수만 개의 언약이다.
 비단 남녀의 사랑에서 만이겠는가. 돌아서 생각하면 좀 더 잘해줄걸, 따뜻한 밥 한 끼 같이할 걸, 한 번만 더 안아줄 걸, 그 말은 하지 말 걸 등의 회한이 또 얼마나 많은가. 

 오늘, 11월 1일이 한국 시의 날이다. 육당 최남선이 1908년 11월 '소년' 창간호에 시 '해海에게서 소년少年에게'를 발표한 것을 기념하여 정한 날이라고 한다. 며칠 전 문학소녀 시절부터 오래 시를 써온 문 시인의 시집 '편지'를 받았다. 붉은 우체통이 그려진 표지에는 수신인을 찾아가는 편지 한 통이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사연은 없어도 좋소/봉투 가득 그대 입김만 채워 주구려/ 눈 내리면 꽁꽁 언 그대 두 뺨에 /입 맞추리다/ 사연은 없어도 좋소" 

 붉은 우체통 벽을 타고 올라가는 글자들도 붉은 가을빛이다. 책 속에는 시인 자신에게, 가족에게 보낸 편지와 사랑초에게, 미나리에게, 등 식물에게 보내는 편지가 있었다. 또한 '저승으로 띄우는 편지' 세 통과 '루게릭 환자의 마지막 편지'가 있었다. 다음은 '루게릭 환자의 마지막 편지'중 앞부분이다. 
 "용서받기 위해 엉금엉금 기면서/기억의 파편들 긁어모으던 손가락 무디다/목 놓아 부르고 싶은데/ 굳은 혓바닥 사이로 소리가 샌다" 
 11월이다. 가을이 붉다. 올가을은 유난히 더 아프다. 저 붉은 우체통 속으로 내 편지도 한 통 넣고 와야겠다. 김감우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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