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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동마을 안골 풍경. ⓒ이상원
경주시 양동마을 안골 풍경. ⓒ이상원
관가정에서 바라본 안락천과 안강평야. ⓒ이상원
관가정에서 바라본 안락천과 안강평야. ⓒ이상원
경주 손씨 종가인 종첨종택(서백당)과 향나무. ⓒ이상원
경주(월성) 손씨 종가인 종첨종택(서백당)과 향나무. ⓒ이상원
여주(여강) 이씨 종가인 무첨당. ⓒ이상원
여주(여강) 이씨 종가인 무첨당. ⓒ이상원
양동마을 안골 풍경. ⓒ이상원
양동마을 입구에서 바라본 향단,관가정, 가람집. ⓒ이상원
양동마을 안골 풍경. ⓒ이상원
양동마을 안골 풍경. ⓒ이상원
오백년 넘게 후손들이 이어 살고 있는 고택. ⓒ이상원
오백년 넘게 후손들이 이어 살고 있는 고택. ⓒ이상원

  경주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불국사와 석굴암 등 신라의 문화재나 유물뿐 아니라 또 다른 세계문화유산이 있다. 바로 경주 시내에서 포항으로 가면서 만나게 되는 양동마을이다. 매표소를 지나면 1909년에 개교된 양동초등학교와 100년이 넘은 구멍가게인 ‘양동점방’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시간여행을 하듯 기와집과 초가집들이 눈에 들어온다. 마을의 일부분만 보이는 것이고, 보이지 않는 골짜기에 종가의 고택과 정자, 서당, 초가들이 숨겨져 있다.

  양동마을은 경주(월성) 손씨와 여주(여강) 이씨의 집성촌(集姓村)으로 560여년 간 대를 이어 살고 있는 곳이다. 이 마을은 두 사위가 장가를 와서 정착하면서 빛나는 역사가 시작되었다. 먼저 경주 손씨인 손소가 이 마을에 살던 풍산 류씨 처가에 장가 들어 살면서 경주 손씨의 가문의 뿌리를 내렸다. 다음은 여주 이씨인 이번이 먼저 자리잡은 경주 손씨 처가에 장가 들어 살면서 여주 이씨가 이 마을에 터를 잡았다. 

  임진왜란 이전에는 남녀 균등 상속이어서 처가 동네에 장가 가서 한 성씨가 세력을 넓힌 것은 흔히 있었으나 두 성씨가 균형을 이루면서 번창한 것은 드문 사례라고 한다. 이 마을이 두 성씨의 마을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손씨 집안에서 손소와 손중돈, 이씨 집안에서 이언적이라는 뛰어난 인물이 나와서 가능했다. 양민공 손소는 함경도에서 일어난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세조 때 적개공신으로 선정되었다. 그의 아들 우재 손중돈은 여러 고위 벼슬을 거치며 청백리로 선정되어 이 마을에 토착기반을 굳건히 했다. 한편 이번이 손소의 딸이자 손중돈의 여동생과 결혼하여 낳은 장남이 회재 이언적이다. 회재 이언적은 조선의 대표적인 문신이자 뛰어난 성리학자로 동방오현(東方五賢)으로 꼽혔고, 그로 인해 여주 이씨 또한 이 마을에서 번성하게 되었다.  

  두 집안의 후손들이 훌륭한 조상을 닮고, 가문을 빛내고자 노력하는 과정이 바로 양동마을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손씨와 이씨 두 문중은 협력과 생산적 경쟁을 거듭하면서 이 마을이 발전하게 되었다. 서당도 안락정(손씨 서당), 강학당(이씨 서당)으로 따로 운영했고, 회재 이언적의 학덕을 기려 ‘옥산서원’, 우재 손중돈의 학덕을 기려 ‘동강서원’을 세웠다. 정자도 따로 지어 무려 10개나 된다. 이러한 경쟁이 마을의 건축물에도 반영되어 서로 좋은 터를 잡아 솜씨 있는 집을 지으면서 우리나라 건축의 보고가 되었다. 후손 교육도 두 가문 별로 특색이 있었다. 조선 500년 동안 과거시험에서 문과는 경주의 전체 합격자 59명 중 이 마을 출신이 29명이었다. 생진과는 경주 전체 87명 중 이 마을 출신이 35명이었다.

  양동마을은 삼남(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4대 명당으로 꼽혔다. 이 마을을 옆에서 감싸고 있는 성주봉에서 바라보면 설창산 아래 4개의 산줄기와 5개의 골짜기가 풍수에서 길지로 꼽히는 勿(물)자 형상을 이룬다. 마을 사람들은 이 형상을 지키기 위해 산등성이를 피해 골짜기에 집을 지었다. 마을 앞에는 형산강 지류인 안락천이 흐르고 넓은 안강평야가 자리 잡고 있다. 

  1984년에 이 마을 전체가 국가민속문화재로 등록되었고, 2010년에 <한국의 역사마을 ‘하회와 양동’>이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되고 규모가 큰 민속마을이고, 국보 1점, 보물 4점, 국가민속문화재 12점, 경상북도지정 문화재 8점 등 가장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임진왜란 이전에 지어진 살림집은 전국에서 10채가 남아 있는데 그 중 4채가 이 마을에 있으며, 그 4채 중 3채(무첨당, 향단, 관가정)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조선 초기부터 조선 말기까지의 다양한 형태의 한옥이 있어 학계나 문화계에서 이 마을을 ‘한옥의 박물관’이라고 부른다고 한다.

  마을 전체를 다 둘러보려면 충분한 시간이 필요하다. 양동마을은 여러 코스와 둘레길이 만들어져 있어 다양하게 탐방할 수 있다. 그 중에서 국가민속문화재인 경주 손씨 종가인 송첨종택(서백당),여주 이씨 종가인 무첨당, 관가정, 향단이 양동마을을 대표하는 가옥으로 그곳에 다양한 인문학적 얘기가 담겨 있다. 또 여러 고택과 정자 편액들은 당대의 저명인사와 최고의 서예가들이 쓴 것으로 그 뜻을 새겨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양동마을에 가면 조선이 보인다. 마을의 구성은 유교의 이념에 따른 조선의 신분제도를 보여준다. 가장 높은 곳에 양반의 기와집, 그 밑에 노비나 하인들의 초가집이 배치되어 있다. 집은 가장 높고 좋은 자리에 조상을 모시는 사당이 있고, 남녀의 생활 공간도 나누어져 있다. 양반들은 종가나 정자, 서원 등에서 소통하고 공부하고 풍류를 즐기며 지배계층으로서의 기득권을 누렸다. 하인이나 노비들은 우물이나 빨래터, 들판에서 일을 하고 양반을 받들며 고달픈 삶을 살아야 했으리라는 게 눈에 그려진다. 

  그러나 이 마을 양반들은 혜택을 받기만 한 것이 아니라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는 기꺼이 나서서 사회적 의무를 다했고 목숨까지 바쳐 선비정신을 실천했다. 임진왜란 때 손씨 가문의 손엽, 손시, 손종하와 이씨 가문의 이의잠, 이의택 등이 의병활동을 활발히 벌였다. 병자호란 때는 관직을 그만 두었음에도 손종로가 억보라는 노비와 함께 전쟁에 나가 전사했고, 마을 입구에 그 둘을 기리는 <정충각(旌忠閣)>, <충노각(忠奴閣)>이 세워져 있다. 

  또 부당하고 불의한 것으로부터 마을공동체를 지켜야 할 때는 하나가 되었다. 한 예로 일제감점기 때 동해남부선 철로가 양동마을을 통과하도록 설계되어 마을이 두 동강이 날 뻔한 위기에 처하자 마을 주민은 연좌시위에 들어갔다. 특히 노인들이 앞장서서 죽음을 불사한 반대 투쟁을 벌인 끝에 결국 철도 노선이 마을 앞 들녘으로 돌아가도록 변경되어 마을을 지킬 수 있었다. 양동마을 앞에 있던 간이역 ‘양자동역’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폐지되었다.

  정월 대보름이나 추석 전후에 아랫말(이씨 문중), 웃말(손씨 문중)로 나누어 줄다리기나 윷놀이를 하는데 경쟁하는 놀이지만 “웃말이 이기면 풍년이 들고, 아랫말이 이기면 마을이 편안해진다” 고 하며 하나가 되어 마을의 화목을 도모한다. 

  양동천을 따라 나있는 큰길(안길)뿐 아니라 뒷길과 샛길을 따라 걷고 언덕에 올라 마을을 보고, 여러 골짜기에 있는 집들을 보면 모두가 아름다운 한 폭의 산수화가 된다. 양동마을의 집은 자연을 거스르지 않고 집터에 맞게 지었기 때문에 똑같은 집이 없다. 집마다 주인의 철학과 예술 감각이 담겨 있다. 사람이 살고 있어 온기와 삶의 활력이 느껴진다. 500년이 넘은 전통가옥에 지금도 후손이 산다는 것은 이곳 양동마을이 사적지나 민속마을 전시장이 아닌 생활터전이고 집들이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래서 더욱 소중하고 잘 보존해야 한다. 

  양동마을은 마을 전체가 국가민속문화재이고 특히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면서 철저하게 문화재보호법의 적용을 받고 있다. 그에 따라 마을의 보호, 관리, 보수 등은 문화재청의 예산 지원을 받아 하고 있으나 개인이 증•개축은 물론 작은 수리도 임의로 할 수 없고, 규제를 받아서 주민들의 불만도 있다고 한다. 흔히 한옥은 여름에 시원하고 겨울에 따뜻한 것으로 알고 있으나 양동마을은 옛날 방식이라 불편함이 많고, 또 관광객이 늘어나면서 개인의 사생활이 침해 당하는 경우가 많다. 일부 관광객은 주민이 가꾼 농산물을 가져가기도 한다니 무심코 한 행동 하나가 관광지의 인심을 사납게 하는 요인이 된다. 이곳 주민의 삶을 존중하고 방문 예절을 지키는 것이 필요한 이유이다. 

  이 마을의 집 안채는 대부분 일반에게 공개되지 않아 한옥의 아름다움을 속속들이 볼 수 없어 아쉽기도 하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입장료 4,000원이 비싸다고 하기도 한다. 그러나 현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대부분 사라진 오래된 전통가옥을 만나고, 마음속의 고향을 떠올리며 잠시 멈추어 쉬어가는 시간을 가질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지 않겠는가. 

  2007년 마을에 전기가 유입되던 전선을 땅속으로 묻어 전선과 전봇대가 보이지 않는다. 상업적 시설이 거의 없고, 작은 가게와 소박하고 아담한 몇 개의 식당이 전부이다. 편의 시설이 없어 불편하기보다는 오히려 마음이 편하고 정겹게 느껴진다. 다양한 한옥과 아름다운 풍광 때문에 수많은 영화, 드라마, 예능 프로그램이 이 마을에서 촬영되었으나 일반인은 캠핑을 할 수 없고 차도 가지고 들어갈 수 없다. 

이상원 사진가 swl5836@naver.com
이상원 사진가 swl5836@naver.com

  경주와 한국을 넘어 세계의 보물이 된 양동마을! 
  이곳을 찾는 많은 외국인들은 다른 어느 나라에서도 이 마을처럼 풍광이 아름답고, 오래된 전통을 이어가는 곳을 찾기 힘들다며 놀란다고 한다. 특히 양동마을은 유네스코가 2013년 세계 160여 나라에 산재한 981점의 세계유산 전체 중에서 ‘지속가능한 발전’을 가장 잘 구현한 26개 사례 가운데 하나로 뽑을 만큼 세계가 주목하는 마을이 되었다. 이런 마을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것은 우리나라의 자랑이다. 500년을 이어온 양동마을이 다시 천 년을 이어가기 위해 우리 모두의 관심과 사랑이 필요하다. 전통 유지와 원형 보존만을 강조할 것이 아니라 문화재로서의 가치를 보존하되 주민의 입장을 반영해 제도 개선도 필요해 보인다. 객지로 나간 사람들과 젊은 층이 들어와 살 수 있는 환경을 만들고 시대의 변화에 맞는 발전을 위하여 지혜를 모아야 할 것이다. 

  시대와 국경을 초월해 읽을수록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는 고전처럼 방문할 때마다 선조들의 지혜와 우리 문화재의 소중함을 새롭게 느낄 수 있는 곳이 양동마을이다! 이상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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