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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단 시인
김단 시인

이번 기고문은 3년 전 별세하신 故 김형배 어르신의 가슴 절절한 사랑을 얘기해보고자 한다. 

어르신은 필자가 호계동에서 살 때 우리 집 근처에 사시던 주민이었다. 치매로 인해 요양병원에 계시던 아버지와 연세가 같아 어르신에게 더 관심을 가지기도 했다. 

어르신은 9년 전 할머니와 사별한 후 혼자 집 근처에 소일삼아 텃밭을 가꾸면서 사셨다. 필자는 그런 어르신을 보며 효에 대한 생각과 성찰을 하기도 하였다. 

간혹, 어르신과 대화에서 부모에 대해 효를 행하라는 말씀을 어르신에게 숱하게 들었지만 먹고 산다는 핑계로 울산에서 40여 년 가까이 짚공예를 해오신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치 못하고 짚공예 기술에 대한 맥을 끊기게 한 것도 어르신과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지금에서야 생각을 해보니 더없는 불효를 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세상을 많이 살지는 않았지만 필자의 나이도 한 갑자를 넘어서니 그때 어르신이 하신 말씀과 아버지께서 하신 말씀을 되뇌어 보니 그때 조금만 더 노력했더라면, 그때 조금만 더 관심을 가졌더라면, 지금 와서 이렇게 마음이 불편하지 않았을텐데 말이다. 

그런 내가 지금은 내 자식과 내 후배들에게 그런 얘기를 하고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한 현상인 것 같다. 

그렇게 세상에 대해 당당하던 어르신이 변하게 된 것은 할머니께서 돌아가신 후부터였다. 처음 2년 정도는 바깥출입조차 하지 않으셨고 그다음부터는 그렇게 정성껏 보살폈던 텃밭이 점점 더 묵밭으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아이들과 함께 어르신의 집을 방문해 식사도 함께하며 마음의 안정을 해드렸지만 할머니에 대한 사랑은 세월이 가면 갈수록 더 깊어만 가는 것 같았다. 

하여, 시심은 얕지만 그때 어르신의 심경을 작품으로 쓴 적이 있었다. 그 작품이 바로 '어차피 만나게 될 것을'이다.

 어차피 만나게 될 것을

 이제 남은 시간도 얼마 없다.
 짙푸르게 보이던 하늘도 점점 더 하얗게 보이고 바짝 탄 목구멍 안에선 마른 기침만 연신 새어 나온다.
 하얀 백열등 아래 열병을 앓은 듯 온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겁기만 하다.
 작년 여름 장마 때부터 새기 시작한 얼룩이 천장 가장자리 쪽에 선명히 그려져 흐릿해진 눈을 어지럽힌다.
 열 한해 전 어느 봄날 할멈이 허리를 두드려가며 한 도배였는데 얼마나 흘렀을까.
 집 앞 텃밭에서 억새 뿌리를 괭이로 캐고 동네 어귀 자그마한 논배미에 봇물 보러 간지가 언제였는지 이젠 아예 기억조차도 나지 않는다.
 할 일도 많고 하고픈 일도 많았는데 다시 꿈지럭 거리며 일어서야지.
 텃밭에 심은 들깨랑 참깨 볶아 손주 녀석들 오면 바리바리 싸서 보내줘야 하는데 어이할꼬
 이 망할 놈의 침대가 이 썩을 놈의 방구석이 삶에 지친 육신을 놓아주질 않는구나.
 오늘따라 아홉 해 전 동지섣달 그 추운 날 뭐가 그리 급하다고 두눈가에 이슬 가득 머금고 먼저 간 할멈이 이리도 눈에 밟힐꼬
 어차피 마음의 문만 열면 어차피 이생의 문턱만 넘으면 서로 만나게 될 것을.


할머니를 생각하는 마음, 삶에 초월한 듯한 어르신의 말씀과 표정이 이 작품을 볼 때마다 오롯이 떠오른다. 

어르신은 아픔과 외로움이 없는 곳에서 할머니와 함께 다정하게 텃밭을 일구며 잘 지내고 계시겠지. 

언제쯤 어르신을 뵐 수 있을진 몰라도 그때 어르신의 그 가르침으로 인하여 더 당당한 모습으로 세상 풍파를 헤쳐 나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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