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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인 1924년 건설된 구 삼호교.
일제강점기인 1924년 건설된 구 삼호교.
울산향토사연구회가 발간한 제33집 향토사보.
울산향토사연구회가 발간한 제33집 향토사보.

 

울산 태화강을 남북으로 연결하는 삼호교는 3개가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4년 건설된 삼호교는 이제 구 삼호교라고 불리고, 바로 옆에 1959년 놓인 삼호교가 있으며, 서쪽으로는 1990년대에 설치된 신 삼호교다.

 이 가운데 태화강에 놓인 최초의 근대식 콘크리트 교량인 구 삼호교는 남구 삼호동·무거동과 중구 다운동을 잇는 인도교로, 울산의 근대화가 시작되는 시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는 평가다. 구 삼호교는 등록문화재 제104호다.

 울산향토사연구회가 발간한 제33집 향토사보에 이 같이 구 삼호교의 역사적·사회적·문화적 가치를 재조명하는 글이 게재됐다. 바로  이동환 태화강생태연구회 회장의 <근대문화유산, 구 삼호교>다.

 이동환 회장은 “길이는 150m이고, 폭은 4,5m에 불과한 구 삼호교가 경주와 부산, 언양을 잇는 교통의 요지 역할을 했다"고 강조했다. 이어 “태화나루를 통해 경남과 부산으로 연결되던 길을 바꾸어 놓은 것으로 울산에서 부산과 언양 방면으로 통하는 국도 소통에 큰 기여를 했다"고 부연했다.

 1924년 5워 28일자 조선일보 보도에도 '삼호교 개통식에 대해 경남 울산군 범서면 삼호교는 원래 험악한 하천으로 비가 오면 동부산 산간의 교통이 차단된 일이 있어 막대한 불편을 주었는데, 이 교통의 편리를 도모하기 위해 대정 10년 1921년 3월 경 김홍조 씨가 발의해 3월 말에 가설 허가가 나고 일본인 청부자 세영에게 118,900엔에 낙찰돼 11월 공사에 착수했으나 다음해 1922년 7월 대홍수로 공사가 수포로 돌아갔고 그 다음해 8월 큰물에도 큰 손해가 생격던 장시일의 공사가 겨우 1924년 5월 23일 준공, 길이 120m 석교 위에 관람인 6,000명에 달하며 대성황리에 개통식을 거행했다'고 전했다. 

 이후 삼호교의 통행량이 계속 늘어나자, 1959년 삼호교 바로 옆에 새로운 다리가 건설되며 삼호교라는 이름을 차지했다. 1990년대에 또 하나의 삼호교가 들어섰는데, 울산북부순환도로의 신 삼호교다. 삼호교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다리가 세 개(구 삼호교, 삼호교, 신 삼호교)가 된 것이다.

 구 삼호교의 변화상에 대한 서술과 함께 이 회장은 “구 삼호교는 차량 통행로의 역할은 삼호교와 신삼호교에 모두 넘겨주고 보행자 전용교량의 기능만 남았다“며 "태화강 국가정원 서쪽 경계에 위치한 다리로 은하수다리와 십리대밭교와 더불어 남북으로 나뉜 국가정원을 사람들이 넘나들 수 있도록 해주는 아주 중요한 다리“라고 현 시대의 구 삼호교 가치를 강조했다. 

 이 밖에 향토사보에는 이상도 회원의 '추모, 인촌 김송태 선생님'과 인촌 선생의 유작, 안성환의 '방어진 목장과 마성', 엄형섭의 '자란전 국역', 정재락의 '관문성 활용방안 소고', 김원의 '배냇골의 역사와 명승지들', 고원도의 '울산 충의사에 배향된 고高씨 문중 4인의 행장 고찰', 박경자의 '석남 송석하를 바라보는 후학들의 시선', 이문희의 '예술을 사랑하고 자연을 노래한 증곡 천재동 선생'이가 수록됐다. 정종희의 '나의 살던 고향은', 이상순의 '도서관 운동가 엄대섭 선생', 차영자의 '조선 중기 해동기를 남긴 성재 장희춘', 박현수의 '영축 통일신라 불교의 성지' 등도 담겼다. 
 김미영기자 lalala40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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