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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훈 수필가
오병훈 수필가

나흘간의 설 연휴를 앞두고 가까운 지인이 경주로 여행을 한다며 동행하자고 했다. 뭐가 그리 바쁜지 겨우 하루의 시간을 내 승용차편으로 경주로 향했다. 새벽에 출발했더니 고속도로가 붐비지 않아서 평소와 다름없이 편안하게 달릴 수 있었다.


 경주는 수학여행 때마다 찾았던 곳이다. 그리고 수시로 경주 여행을 했지만 볼 것도 많고 공부할 것도 많은 곳이 아닌가. 아직도 곳곳에 천 년의 신라 역사가 살아 숨쉬는 고장. 우리는 불국사를 먼저 가느냐 안압지와 첨성대냐, 아니면 대릉원이냐를 두고 차 안에서 입씨름을 했다. 


 그렇게 해서 찾아간 곳이 국립경주박물관. 오른편에서 맨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종각. 창살 틈으로 본 에밀레종은 그야말로 시야를 가득 채워 어두운 벽을 마주한 느낌이었다. 어릴 때 처음 본 에밀레종의 느낌은 저것이 소리가 날까 하는 그저 커다란 놋쇠 덩어리였다. 


 나이가 들어 마주한 종은 달랐다. 공학적 가치는 물론 완벽한 아름다움에 자리를 뜰 수 없었다. 하늘 복판에 무릎을 다소곳이 모으고 앉은 공양상과 천의를 휘날리며 비파를 연주하는 비천상이 금방이라도 살아서 날아갈 것만 같았다. 부드러운 천의(天衣) 자락을 나부끼며 구름 속으로 사라질 것 같은 선명함이라니. 천상의 향내와 음악 소리만 여운으로 남고.


 당시 신라의 주조공들이 얼마나 노심초사했을까. 오늘날에도 에밀레종 규모의 범종을 만들려면 쇳물을 녹이는 용광로와 거푸집, 숙련된 주조공이 따라야 가능한 일이다. 천 년이 지난 오늘날에도 우리를 놀라게 하는 신기의 예술품을 두고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일행은 박물관의 전시유물을 보겠다면서 안으로 들어갔지만, 나로서는 도저히 범종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우리의 범종은 중국이나 일본 종과 다르다. 중국 종은 통형이고 아래가 넓으며 끝이 갈라져 있다. 일본 종 또한 중국 종의 양식을 따르고 있다. 그러나 우리 범종은 상하부 폭이 같고 오히려 통부의 중간이 볼록하다. 소리를 안에 가두어 두었다가 더 멀리 보내기 위해서이다. 우리 종에는 종 머리에 넘치는 소리가 빠져나가는 용통을 마련해 두었다. 이러한 용통 구조는 세계 어떤 종에도 없는 우리만의 독창적인 양식이다. 

 

삽화. ⓒ왕생이
삽화. ⓒ왕생이

 우리 종은 높이 달지 않고. 바닥에 닿을 듯 말 듯 매단다. 대신 바닥을 솥단지처럼 움푹하게 파서 종소리가 종 몸통 안으로 되돌아가도록 했다. 밖에서 종을 치면 소리는 종 벽을 울리면서 되돌아가기를 반복하는 동안 메아리가 생기게 되는데 이른바 맥놀이 현상이다. 그래서 리듬이 생기게 되고 그 소리가 '에밀레- 에밀레-' 한다고 하여 에밀레종이라고 전한다. 그러나 실제의 종 이름은 국보 제29호 성덕대왕신종(聖德大王神鐘)이다.


 종은 소리를 내는 악기의 기능을 하고 있다. 부처님의 말씀을 중생들에게 널리 알려 귀를 열어 준다는 의미로 종을 친다. 종은 맑고 울림이 크며 멀리서도 들려야 한다. 그래서 규모가 점차 커지게 되었다. 세상 끝까지 종소리를 보내려면 소리를 잘 전달하는 재질이 필요하다. 


 범종은 구리와 주석을 합금한 청동을 쓴다. 구리 성분이 너무 많으면 주조하기는 쉬워도 물러서 종을 쳤을 때 찌그러질 수 있다. 주석이 많으면 맑은소리가 나지만 종이 깨어지기 쉽다. 적당량의 배합이 매우 중요하다. 보통 구리와 주석의 비율은 85대 15로 한다.


 우리의 종 주조 기술은 세계 어느 종과 비교해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독창적이고 우수하다. 아름다운 소리를 보다 멀리 전하기 위해 맥놀이라는 놀라운 기술을 개발했으니 얼마나 자랑스러운가. 주조술이 뛰어난 만큼 소리도 맑고 깨끗하다. 우리 종은 소리가 그윽하다. 울림이 좋아서 가까이 들으면 소리가 크다고 느끼지 못한다. 오히려 십리 이십리 밖에서 선명하게 들을 수 있는 바로 우리의 소리이다. 그릇 깨어지는 것 같은 가벼운 소리가 아니라 오케스트라의 합주음처럼 웅장하면서도 절대로 지나치지 않는 곰삭은 소리. 천상의 소리요 마음을 일깨우는 소리가 바로 우리의 범종소리다.


 에밀레 종각을 몇 바퀴나 돌았을까. 일행이 박물관을 나왔을 때까지 혼자 밖에서 서성거렸더니 모두 이상하다고 했다. 종이 뭐가 볼 게 있느냐고 생각했으리라. 신라의 종소리를 마음에 담고 다음 코스인 불국사를 향해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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