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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식 전 울산대 교수
김대식 전 울산대 교수

광해군, 인조 때 첫 영의정으로 발탁된 이원익은 집권 세력과 대척점에 서 있던 남인 출신이었다. 광해군의 북인 정권과 인조의 서인 세력이 당파를 떠나 이원익을 첫 영의정으로 기용한 것은 백성의 마음을 얻어 혼란스러운 정국을 안정시키는 일에 도움을 받기 위함이었다. 

이원익이 인조의 부름을 받고 한양에 도착하자 백성들이 오리(梧里) 대감이 오셨다고 기뻐할 정도로 경륜과 인품이 겸비된 재상이었다. 이원익은 선조 때 황해도, 평안도 지역의 지방 수령으로 백성을 사랑한 애민(愛民)정신의 안민(安民)행정으로 많은 치적을 쌓아 백성들이 흠모(欽慕)한 유능한 관리였다.

조선의 조세제도 중 백성에게 가장 부담이 큰 세금은 공물(貢物)과 임금에게 바치는 진상(進上)이었다. 공물과 진상이란 조선의 조세제도인 조(調)는 지역 특산물을 전답의 많고 적음, 즉 재산 규모와 상관없이 고을에 부과된 공물을 집집마다 일률적으로 나눠서 부과하는 공납제도였다.

중종반정 이후 훈구세력과 척신(戚臣)들이 대지주(大地主)와 대상인(大商人) 등 호강(豪强)층과 결탁하여 백성이 납부할 공물을 대신 바치고 이자를 보태 시세보다 몇 배나 폭리를 취하는 방납(防納)으로 백성을 수탈했다.

율곡 이이는 지역의 특산물을 나라와 임금에게 바치는 공물의 수취 방법을 쌀과 무명으로 대신한 대공수미법(代貢收米法)이란 공물변통(貢物變通)으로 방납의 폐단을 막는 개혁 정책을 주장하며 요구했다. 이이는 시대 변화에 맞게 백성들을 삶의 질곡(桎梏)에서 구제하기 위해 조세 법제를 개혁하는 민생 대책을 만언소(萬言疏)에 담아 선조에게 건의했지만 선조는 외면했다. 그러나 임진왜란 이후 선조 대에 왕실 진상품을 제외하고 일시적으로 세 차례 시행된 공물작미(貢物作米)는 이원익이 광해군, 인조 시대에 본격적으로 논의한 대동법의 시발점이 댔다.

광해군이 즉위년(1608)에 백성에게 베풀 시혜 대책을 포함한 정책 지침에 대한 조정 대신의 의견을 묻는 비망기(備忘記)를 내렸다. 비망기에 대한 응답으로 공물변통에 관한 시행을 주청한 이원익의 제청을 받아들인 광해군은 경기도에 한하여 실행할 것을 주문하며 선혜법(宣惠法) 시행을 윤허했다.

이원익은 대동법의 시초라 할 경기선혜법을 일회적인 조치로 생각한 광해군을 설득하여 항구적인 제도로 전환시켰다. 반정 정권의 인조는 이원익을 영의정으로 내세워 백성의 마음을 얻은 후, 이원익이 제청한 민생 문제 해결을 국정 운영 기본 방안으로 안민(安民)정책을 채택했고, 연장선에서 공물을 줄이는 삼도대동법(충청도, 전라도, 강원도) 추진을 시작했다. 

삼도대동법은 조선 최초의 전국적인 공물변통이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조선 왕조의 건국이념인 민본주의(民本主義), 즉 나라의 근본인 백성을 위해 "때에 따라 법을 변통해 백성을 구제하는 정치"란 율곡 이이의 시의(時宜)와 실공(實功)철학이 삼도대동법에 내재돼 있다. 이원익은 대동법을 실무적으로 추진할 관료로 조익을 선정해 국가의 경비와 세금 삭감을 주관하기 위해 설립한 재생청(裁省廳)의 책임자로 임명했다. 조익은 대동법의 시행세칙 법조문인 대동사목(大同事目)을 마련해 대동법이란 세제 개혁이 안착되게 만든 전문 기술 관료인 테크노크라트였다.

대동법이란 조세 개혁책은 공물가의 부과 대상이 고을에서 전결로 바뀌고, 공물가를 삭감해 나라의 근본인 백성에게 과도하게 부과된 국가 수취인 공물 부담을 줄여주는 민생 안정 개혁정책이었다. 그러나 삼도대동법이란 올바른 개혁 제도 실시에 이권 카르텔을 형성한 토호 세력과 탐관오리, 방납인 등 기득권은 반기를 들었다.

특히 논과 밭이 많은 토호세력의 저항은 '이괄의 난'으로 야기된 사회적 혼란과 인조의 미온적 자세와 맞물려, 결국 이원익은 삼도대동법을 중단하자는 상소를 올리고 인조는 윤허했다. 백성의 지지 속에 삼도대동법을 이끌던 이원익은 사대부에게 교활한 관리의 전형으로 낙인된 중국 북송의 '왕안석 신법'과 견줘 이데올로기적 소인배로 비판을 받았다. 대동법의 실무 책임자이며 기본 뼈대를 만든 조익의 삼도대동법 폐지 철회를 요구한 상소문을 본 이귀 등 반정 공신 고위 관료들이, 대동법은 반드시 시행해야 할 위민(爲民)법이라고 말했다.  

이원익이 시도한 삼도대동법을 효종 대에 재상 김육이 안민(安民)을 실현하려고 대동법 실시에 앞장섰다. 김육은 대동법을 이해하고 있는 이시방을 호조판서로, 충청도 서산 출신이며 대동법 지지자인 김홍욱(추사 김정희의 7대조)을 충청도 관찰사로 임명하여 호서대동법을 추진했다. 대동법의 성립은 조익과 이시방 등 전문 기술 관료가 백성을 위한 안민 개혁정책이 좌초되지 않도록 적극적으로 실천에 옮긴 덕분이었다. 

윤석열 대통령은 "개혁 이외에 우리가 살길은 없다"라고 말했다. 대한민국의 미래 경쟁력은 노동, 교육, 연금 등 3대 개혁에 달려있으며, 이를 강력하게 추진해 민생과 경제를 살리겠다는 개혁 실행에 방점을 찍었다. 조선의 백성들은 기존 세금의 약 1/5 정도만 내는 최고의 안민 개혁책이 대동법이었다(이정철). 대동법이란 세제 개혁의 성공은 기득권의 저항과 사대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개혁 정책이 민본주의란 조선왕조 건국 이념과 맞다고 판단한 관료들이 위민(爲民) 정책을 꾸준히 진행했기 때문이다. 

윤석열 정부의 공직자들은 윤 대통령이 제안한 개혁 정책의 실행에 기득권자의 격렬한 저항과 반기를 들 것을 예측해, 국민의 지지와 합의를 이끌어 내는 지혜를 영의정 이원익이 물꼬를 튼 대동법에서 배울 것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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