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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련 동화작가
장세련 동화작가

무엇이든 새로 시작하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나이가 들수록 이런 용기는 줄어든다. 새로운 기회 앞에서 주춤거리기 마련이다. 이 나이에 뭘, 이라는 생각에 포기하는 이들도 많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 앞에서도 용기의 붕괴는 속수무책이다. 격려의 말임에도 정작 숫자를 의식하곤 망설이다 포기하는 이가 많다. 무언가를 시작하기에 너무 늦었다는 생각을 바꾸려는 안쓰러움이 느껴져 서글퍼지는 것이다. 과연 나이에 걸맞은 일은 무엇일까. 곰곰 생각해보면 그런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도 나 역시 나이 많음을 시듦의 동의어로 여겨왔다. 


 이제는 아니다. 생각이 바뀌었다. 모든 것은 자신의 역량을 가늠한 스스로의 판단일 뿐 나이 앞에서 망설여야 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하고 싶은 일을 시작할 용기만 있으면 언제든 새로운 시도는 가능하다. 한 권의 책 덕분이다.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애나 메리 로버트슨 모지스/수오서재)가 그것이다.


 이 책은 76세에 그림을 시작한 저자의 자서전이다. 모지스는 101세까지 사는 동안 1,600여 점의 작품을 남긴 화가로 88세에 '올해의 젊은 여성'으로 선정된 미국 할머니다. 저자의 100번째 생일은 '모지스 할머니의 날'로 지정되었고, 존F. 케네디 대통령이 '미국인의 삶에서 가장 사랑받는 인물'로 칭한 사람이다. 새겨 읽을 만한 것은 결코 순탄하지 못한 저자의 삶이다. 가난한 집의 여러 남매 중 장녀였던 저자는 정규교육도 받지 못했다. 12세 때부터 15년 가까운 세월을 가정부 생활을 했다. 그러던 중 남편을 만나 농장 생활을 했고, 열 명의 자녀를 출산했지만 다섯 명만 살아남았다. 이후에는 관절염으로 농장일은커녕 취미로 하던 자수 놓는 일까지 못하게 된다. 실의에 빠져 절망할 상황을 저자는 붓을 잡으면서 버틴다. 그렇게 그려낸 추억의 장소들이 어느 수집가의 눈에 띄면서 세상에 알려지게 된다.


 이 책에는 저자의 파란만장한 삶이 담담할 정도로 객관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눈에 띄는 문학적인 묘사는 없다. 그보다는 푸근한 인상의 할머니가 한 사람의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주는 듯하다. 저자의 그림 70점은 이야기를 능가하는 덤이다. 편안하고 아기자기한 그림을 보는 재미는 아주 쏠쏠하다. 누군가의 인생을 듣는 일이 지겨울 수도 있으나 잔잔한 일상을 들여다보는 일이 조금도 부담스럽지 않은 훌륭한 장치다. 어디를 보나 파란만장이란 표현이 어울리는 삶인데도 저자는 참 행복한 삶이라고 말한다. 어떤 고난과 슬픔의 더께도 긍정의 힘으로 벗겨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자부심이 아닐 수 없다.


 책 속 대부분의 그림은 과거의 기억을 살려낸 것들이다. 그림에서는 결코 안온하지 못했을 법한 저자의 성장기가 조금도 엿보이지 않는다. 그림 속의 집과 나무와 들판은 녹색과 흰색이 대부분이다. 거기에 드문드문 그려진 사람들의 알록달록한 옷차림은 스스로가 만드는 인생의 빛깔처럼 다양하다. 사람은 결국 자연의 무늬이므로 그 색깔을 만드는 것은 자신이라는 의미인 듯하다. 저자가 살았던 지역에 눈이 얼마나 많이 자주 내렸을까 하는 건 쉽게 알 수 있다. 폭설에 가까울 만큼 눈에 묻힌 풍경이 많다. 흔히 말하는 동화 속 장면들이다. 농장에서 보낸 저자의 일생은 거의 녹색으로 채색되었다. 그야말로 목가적 풍경이다. 가정부로 일할 때나 결혼을 해서 농장을 경영한 기억들이지만 저자는 자신의 삶이 고달프다고만 느끼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담담한 서술과 아주 걸맞은 그림들은 보는 이의 마음을 편안하게 만든다. 붓 잡는 법도 제대로 익힌 적이 없고, 물감이 비싸서 아껴가며 그린 이야기도 눈물겹기보다 정겹다. 76세에 시작한 그림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다. 어쩌면 이런 생각조차 76세란 나이에서 시듦을 먼저 떠올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저자는 제목에서 말한다. '인생에서 너무 늦은 때란 없습니다' 나이를 장벽처럼 느끼는 이들에게 하는 저자의 숭고한 경험담에 꽂는 책갈피는 나에게도 새로운 도전을 꿈꾸게 한다.


 '사람들은 내게 이미 늦었다고 말하곤 했어요. 하지만 지금이 가장 고마워해야 할 시간이라고 생각해요. 무엇인가를 진정으로 꿈꾸는 사람에겐 바로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젊은 때거든요. 시작하기에 딱 좋은 때 말이에요.' 
 누군가에게 용기를 주는 삶은 쉽지 않다. 그만큼 잘 살아냈을 때라야 가능하기 때문이다. 가장 빠른 때는 언제나 지금이라는 생각을 갖게 하는 '모지스 할머니'의 삶은 바로 그런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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