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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축산에서 바라본 단조성의 경관. 가르마 같아 보이는 곳이 단조성.
영축산에서 바라본 단조성의 경관. 가르마 같아 보이는 곳이 단조성.

신불산(神佛山)이란 이름은 언제부터 명명되었는지는 정확하게 전해지지 않는다. 신(神) 자는 성지라는 뜻의 성산을 의미하고 불(佛)자는 부처를 말하거나 도시를 말하는 것으로도 해석된다. 또한, 한자를 풀이해 보면 신(神) 귀신 신, 불(佛) 부처 불, 산(山) 뫼 산으로 신들이 부처님께 기도를 올리는 산으로도 해석된다. 신불산은 동남으로 '무늘등'을 경계로 하고, 북쪽으로는 간월산을 경계로 한 '쇠판골' 능선을 가장자리로 하여 병풍처럼 가천마을을 둘러싸고 있다. 
 
옛날 이 산 아래 사는 마을 사람들은 신불재(주개덤)에 올라 봄이면 반달비, 곤달비를 뜯고, 큰골, 작은골에는 지천으로 깔린 참나물, 호망추, 배뱁추, 더덕 등 각종 산나물을 뜯고, 고사리밭 등에서는 고사리, 고치미를 채취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신불산에서 영축산으로 향하는 백발능선 길.
신불산에서 영축산으로 향하는 백발능선 길.

# 신들이 부처님께 기도 올리는 산
여름철이면 계곡마다 맑은 물이 흐르는 가운데 우거진 녹음 속에 마을 소를 방목하여 목장이 되기도 하였고, 또한, 큰골 작은골 비탈은 녹비(綠肥-푸른 거름) 예초(刈草-풀을 베는) 장이 되기도 하였다. 가을에는 무늘등 금강골, 큰가거내, 작은가거내, 큰골, 작은골 쏘다니며 머루, 다래, 싸리버섯, 송이버섯을 따다 언양장, 신평장에 내다 팔기도 하였다. 
 
단조성은 신불산과 영취산 사이 해발 1,000m 지점 억새평원에 걸쳐 축성된 석성(石城)으로 남한에서 가장 높은 곳에 쌓은 성으로 알려져 있다. 단조(丹鳥)란 머리가 붉은 학을 말하는데, 산성의 모습이 마치 목을 길게 뽑아 세운 학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단조성의 최초 축성 시기는 신라 시대로 추정되며 신라가 가야를 경계하기 위해 쌓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취서산 고성(鷲栖山古城), 또는 단지성(丹之城)'으로 나타나며, 1907년 편찬된 '증보문헌비고'에 '언양 남쪽 13리 취서산에 있으며, 석축으로 둘레가 4,050척이고 성안에는 우물이 10개가 있다'라는 기록과 순조 31년(1831) '경상도 언양읍지 편'에는 '석축으로 둘레가 4,050척이고 성안에 천지(天池)가 있어 비가 오거나 가뭄에도 물의 증감이 없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한, 영조 3년(1727) 암행어사 박문수가 영남 일대를 암행하면서 단조성을 둘러보고는 “한 명의 병사가 적 만 명을 당할 수 있는 곳"이라고 하였으며, 임진왜란 때 명나라 장수 이여송도 이 성을 쳐다보고는 “마치 하늘에 붙은 성 같다. 조선에 성이 없으랴만 이 성마저 잃을 수는 없다"라고 하면서 난공불락의 성이라고 극찬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금강골재 동쪽사면을 따라 쌓여 있는 돌무더기.
금강골재 동쪽사면을 따라 쌓여 있는 돌무더기.

# 돌무더기 쌓아 왜적 무찌르던 방어용 무기
임진왜란 당시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왜병(1진) 1만 8,700명이 1592년 4월 15일 부산진성과 동래성을 함락시킨 뒤 사흘 만에 언양읍성과 시루성을 무너트리고 한양 진격을 서두른다. 그러나 왜군은 단조성을 지키고 있는 조선군의 방해로 보급로가 차단되고, 더 이상 북상을 추진할 수 없자 단조성을 공략하기 위하여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별 효과가 없었다. 
 
이때 단조성은 의용장 신광윤은 큰 글씨로 기를 세우고 마을의 장정들과 언양 현의 군졸 수백 명과 통도사에서 온 승려들, 밀양, 삼랑진 등지에서 모여든 의병들을 규합하여 구국 결사대를 일으킨다. 
 
구국 결사대가 지키는 단조성은 난공불락의 성이 이었다. 신광윤 장군은 담을 쌓고 구덩이를 파서 복병을 매복시켰는가 하면 의병들로 하여금 단조봉과 열두 쪽 배기 등 베랑 끝에 수백 군데의 돌무더기를 쌓아 올리고, 돌무더기마다 깃발을 세워 가짜 의병을 만들어 적들을 교란하게 시켰다. 낮에는 북을 치며 군사를 훈련했고, 밤이면 횃불을 든 허수아비를 베랑 끝에 세웠다. 
 
지금도 신불산 상벌 동쪽 벼랑 끝에는 머리 크기만한 돌들이 무더기로 쌓여 있는데 임진왜란 당시 금강골을 타고 올라오는 왜적을 무찌르던 의병들의 방어용 무기였다.
 
그러나 하늘에 걸려있는 성으로 불리던 단조성이 어이없이 함락당하고 말았는데, 그 사연은 다음과 같다. 
 
옛날 가천마을에 몇 대째 외동아들을 둔 노파가 살고 있었다. 임진왜란이 발생하자 근처에 사는 젊은 남정네들은 모두 전쟁터로 끌려갔고, 노파의 아들도 전쟁터에 끌려갔다. 노파의 아들은 이 지역의 지리에 밝아 단조성에서 관군과 함께 생활하며 비밀리에 마을에 내려와 적의 동정을 살피기도 하였다. 
 
어느 날 노파의 아들이 왜병에게 포로가 되어 심한 고문을 당해 죽을 날 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노파는 왜병을 찾아가 자기 아들을 살려달라고 대성통곡을 하며 애걸복걸했다. 
 
왜병들은 그 노파에게 만약 단조성으로 가는 길을 가르쳐주면 아들을 살려 주겠다 하였다. 어느 부모가 자식을 죽인다는데 가만히 보고만 있을 부모는 없을 것이다. 노파는 아들을 살리기 위해 재치(才致)를 발휘해 단조성은 마치 “엎드려 있는 사나운 개와 같다"고 하였다. 
 
무슨 뜻인지 모르는 왜군은 노파를 조총(鳥銃)으로 죽이려고 방아쇠를 당기려 하자 “개나 짐승들은 머리가 있는 방향으로는 공격과 방어를 잘하지만, 꼬리나 옆구리 쪽으로는 허점이 많아 항상 포식자들에게 잡아먹힌다"라고 하였다. 
 
단조성의 허점을 파악한 왜군은 들레벌(들 가운데 신불산에서 발원한 천(川)이 흐르고 있는 가천벌. 현재는 삼성 SDI 부근으로 추정됨)에 짚으로 만든 인형을 줄지어 세워 놓고 단조성 서쪽, 백팔등으로 우회하여 청수골로 수만 명이 단조성을 급습했다. 

 

단조성의 경관. 현재 가장 잘 보존돼 있는 서쪽 청수골 들머리 부근.
단조성의 경관. 현재 가장 잘 보존돼 있는 서쪽 청수골 돌머리 부근.

# 노파의 아들살리기로 왜병에 함락 당하기도
의병들은 난공불락의 요새라고 믿고 태연하게 동쪽 낭떠러지 아래쪽만 경계하고 있다가 제대로 한번 싸워 보지도 못하고 몰살을 당했다. 전멸을 당한 관군과 의병들이 흘린 피가 성내(城內)의 못에 흘러들어 피 못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후 성이 설치된 등(登)을 피못등(혹은 비패등)이라 하였으며, 이 지역 마을 사람들은 백발등으로 쳐들어온 왜병을 원망하며 “원수로다! 원수로다! 백발등이 원수로다"라는 백발가 노래를 지어 불렀다고 한다. 
 
해발 1,000m나 되는 고봉준령(高峰峻嶺)에 쌓은 주인공에 대해 의견은 분분하다. 신불산과 영축산의 산 신령이 하룻밤에 쌓았다는 설과 김무력 장군이 충북 옥천의 관산성 전투에서 승리한 후 귀향하여 울주 언양에 주둔하면서 쌓았다는 설이 있다. 또, 신라가 가야를 경계하기 위해 쌓았다는 설 등도 전해진다. 
 

진희영 산악인
진희영 산악인

그렇다면 이 많은 돌은 과연 어디에서 가져온 것일까? 지형적으로 살펴보면 신불산과 영축산은 1km 거리로 떨어져 있다. 속설에 의하면 오래전(빙하기 이전으로 추정)에는 두산이 붙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간빙기(間氷期)로 접어들면서 지금 신불재를 기준으로 분리되면서 많은 돌이 표면으로 드러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이 지역에 사는 백성들이 청수골과 금깅골재에서 등짐과 앞치마에 돌을 날랐다는 설과 신불산 산신령이 밀양 빚더미 계곡의 돌들을 빗자루로 쓸어 왔다는 설 등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진다. 
 
지금의 단조성은 서북쪽은 허물어졌으나 동남쪽은 옛 모습을 많이 간직하고 있다. 해발 940~970m 사이에 형성되어 있는 단조늪의 습지는 약 7,000㎡나 되며 주변에는 고산 초원이 발달했다. 
 
동쪽은 암벽으로, 서쪽은 참나무 숲으로 둘러싸여 있고, 북쪽은 단조봉과 신불산 그리고 남쪽으로는 영축산과 연결되는 능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신불산은 고산 습지로서 학술 가치는 물론이거니와 임진왜란 당시 이 지역의 아픔을 고스란히 지닌 산성을 품은 곳으로 역사성, 학술성 등의 고유한 이미지를 창출하는 새로운 문화자원으로 보존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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