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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원 시조시인
이서원 시조시인

입춘이 어저께였다. 기울어진 겨울 속에서 봄이 우리 곁으로 성큼 다가왔다. 뼛속까지 스며드는 꽃샘바람이 불어온다 해도 저 땅속의 기운생동을 어쩌지 못한다. 남녘에서는 매화가 피었다는 소식이 들려온다. 아무렴, 사군자 가운데 왜 첫 번째로 매화를 꼽았는지 알 것도 같다. 오래전 지인이 그려준 문인화 한 폭이 거실에 있어 다시 본다. 꺾인 고목은 한지 밖으로 저만큼 뻗어 나갔다가, 화폭 끝 아래쯤 다시 들어와 한껏 절제미를 더했다. 그리고 몇 송이 핀 매화꽃은 그저 툭툭 농묵(濃墨)의 원근감을 더해 피워두었을 뿐이다. 그래서 문인화는 여백의 미라고 하지 않던가.

 

오동나무는 천 년을 늙어도 그 가락을 간직하고/ 매화는 한평생 춥게 살아도 향기를 팔지 않고/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본래로 돌아가는 성질이 남아있고/ 버드나무는 백번을 꺾여도 새 가지가 또 곧게 올라온다

 

조선 중기 상촌 신흠(1566~1628)의 시다. 많은 시를 읽어도 그 깊이와 여운이 이처럼 오래 남는 시는 찾기 어렵다. 오동나무의 지조는 천 년이 가도 쉽게 변하지 않고 그 가락을 유지하며, 매화는 아무리 추워도 함부로 그 향기를 팔지 않는다고 한다. 지조란 저런 것인가 싶다. 금방 돌아서며 변하는 인간사의 한 단면을 이처럼 서정을 살려 우회적으로 표현한 옛 시를 보기란 쉽지 않다. 


 신흠은 당파가 달라도 상대를 존중했으며 객관적으로 보고자 했다. 그래서 탄핵과 유배와 좌천을 거듭했지만, 거기에 굴하지 않고 소신껏 정치를 펼쳤기에 후일 영의정까지 오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달은 아무리 이지러지고 또 사라져도 영원히 없어지지 않으며 다시 본래의 보름달로 돌아와 이 세상의 어두운 밤을 환히 밝혀준다. 버드나무도 물가에서 잘 자라기 때문에 아무리 꺾여도 다시 움이 돋고 금방 새 가지가 자란다. 어떤 시련이 와도 견딜 수 있는 곧은 심지와 지혜가 있다면 쉽사리 사라지지 않는다는 절개 또한 엿볼 수 있다. 

 

삽화. ⓒ왕생이
삽화. ⓒ왕생이

 이 시를 보면서 근세의 수필가 윤오영(1907~1976) 선생을 떠올렸다. 윤오영 선생은 위 시를 좋아해 동매(桐梅)를 차용해 '동매실주인(桐梅實主人)'을 호로 삼았다. 그만큼 위 시를 좋아했다는 뜻이다. 자신도 저처럼 살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은연중 내포하고 있는 좌우명이 아니었을까. 그의 수필 '달밤'을 이참에 다시 읽어 본다.

 

내가 잠시 낙향해서 있었을 때 일.
 어느 날 밤이었다. 달이 몹시 밝았다. 서울서 이사 온 웃마을 김군을 찾아갔다. 대문은 깊이 잠겨있고 주위는 고요했다. 나는 밖에서 혼자 머뭇거리다가 대문을 흔들지 않고 그대로 돌아섰다. 맞은편 집 사랑 툇마루엔 웬 노인이 한 분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서 달을 보고 있었다. 나는 걸음을 그리로 옮겼다. 그는 내가 가까이 가도 별 관심을 보이지 아니했다.


 "좀 쉬어가겠습니다" 하며 걸터앉았다. 그는 이웃 사람이 아닌 것을 알자 "아랫마을서 오셨소?" 하고 물었다. "네. 달이 하도 밝기에…"
 "음! 참 밝소" 허연 수염을 쓰다듬었다. 두 사람은 각각 말이 없었다. 푸른 하늘은 먼 마을에 덮여있고, 뜰은 달빛에 젖어 있었다. 노인이 방으로 들어가더니 안으로 통한 문소리가 나고 얼마 후에 다시 문소리가 들리더니, 노인은 방에서 상을 들고 나왔다. 소반에는 무청김치 한 그릇, 막걸리 두 사발이 놓여 있었다.


 "마침 잘됐소. 농주 두 사발이 남았더니…" 하고 권하며, 스스로 한 사발을 쭉 들이켰다. 나는 그런 큰 사발의 술을 먹어본 적은 일찍이 없었지만, 그 노인이 마시는 바람에 따라 마셔버렸다.
 이윽고 "살펴가우" 하는 노인의 인사를 들으며 내려왔다. 얼마쯤 내려오다 돌아보니, 노인은 그대로 앉아있었다.

 

 한 편의 시다. 고요한 달밤을 배경으로 두 사람의 짧은 대화가 전부다. 오래 만나야만 좋은 친구가 되는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농주 한 사발에 단출한 무청김치 안주가 전부라 해도 결코 화려한 술상이 부럽지 않다. 달이 두 사람을 조명해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많은 대화가 오가며 거나하게 취해야만 진정한 우정이라고 할 수 없음도 알 수 있다. 간결하고도 절제미 넘치는 필력, 묘사가 주는 이미지의 함축성, 서정성 넘치는 시골의 정취는 바쁜 현대인들에게는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정감이다. 고요한 달밤에 맺은 인연이 저토록 그리움과 정에 이끌리게 할 수 있을까.


 다시 신흠과 윤오영을 마주 앉힌다. 어쩌면 달밤에 나오는 노인은 신흠이 아닐까 싶어 생각이 깊어진다. 마침 정월 대보름 환한 달빛이 눈부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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