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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무엇으로도 어쩔 수 없는 상황에서 곧잘 "확 죽어버리지도 않나"하는 극언을 한다. 상대가 죽으면 모든 것이 끝나지 않겠느냐는 발상이다. 그러나 상대가 죽어준다고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어떤 전제도 이 말에는 없다. 단지 현재의 기분이 그렇다는 것뿐이다. 여기에 다음은 없다. 분단 반세기를 넘는 동안 우리의 대북관이 이런 극단적 감정에 몰렸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친북인사와 대북실무를 담당하는 정부 당국자, 학자 등 일부를 제하고 나면 거의 이런 감정으로 북한을 대해 왔다. 들리는 소식이라고는 안 좋은 것밖에 없었으니, 당연한 조건반사인지 모른다. 언제 북한이 우리를 위해 좋은 일을 했다는 것을 들어본 기억이 없다. 휴전선을 사이에 두고 끝없는 도발과 분쟁을 일으킨 북한이다. 가끔은, 존재를 잊어버릴 때쯤 우리 인내력의 한계를 테스트하는 대규모 군사모험도 강행했다. 김신조 일당의 청와대습격을 비롯해 미루나무 도끼 사건, 아웅산 테러, 서해교전 등이 그랬다. 이때마다 국론은 당장이라도 북한을 때려잡을 듯이 법석을 피웠지만, 종내는 포기하고 체념하는 수밖에 없었다. 우리 자력으로 북한을 응징한다던가 하는 제재 수단이 없었기 때문이다. 여기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고 언론을 통해 접해 온 북의 실상은 더 한층 염증을 느끼게 했다. 김일성 유일사상에 기초, 선군정치만을 고집하는 북에서 인민의 자유는 송두리째 유린되고 소득도 최빈국 수준을 면치 못하는 '어쩔 수 없는 집단'이었다.
 정부의 대북정책 역시 이 연장선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국민의 정부 들어 '햇볕정책'을 추진했다고 하지만, 북을 어르고 달래는 수준을 벗어나지 못했다. 물자지원이라는 것 역시 북한이 기근(饑饉)을 극복하고, 성장의 동력을 확보해나갈 수 있을 만큼의 보다 획기적인 조치는 취하지 않았다. 남북경협과 이산가족 상봉, 금강산 관광으로 남과 북의 끊어졌던 교류가 재개되고 여기에 대한 보답 차원에서 물자와 금전적 지원을 했을 따름이다. 그것도 우리의 총 국민생산액과 대비하면 민망할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제는 상황이 예전 같지가 않다. 우리의 선택에 따라 북은 전혀 엉뚱한 방향으로 튈 수 있는 상황으로 가고 있다. 남북교류에 만족하고 있어도 괜찮을 한가한 단계는 지났다. 그 위기를 우리가 절대적인 우방으로 믿었던 미국이 제공하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의 움직임은 늘 그렇게 해 왔으니 또 그러려니 넘어가겠지만 미국의 변화는 전혀 다른 상황이다. 미국은 북한을 더 이상 '악의 축'이니 '주민을 굶겨 죽이면서도 군사력만 늘이는 용서할 수 없는 테러지원국' 등으로 부르지 않는다. 동시에 핵을 폐기하라던 기존의 요구도 버렸다. 북한과 어떤 일이 있어도 직접 교섭을 하지 않겠다던 태도도 바뀌었다. 테러지원국의 명단에서 북한이 빠질 날도 멀지 않았다. 50년 이상 영원한 맞수 관계였던 미북 관계가 이처럼 급진전된 것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에 버금가는 변화다. 초기 부시 정부의 대북정책을 주도했던 네오콘의 존 볼턴 전 유엔주재 미국대사가 지금은 부시의 변신을 강도높게 비판하고 있는 상황으로 반전됐다. 그래도 부시의 대북기조는 오히려 더 많은 양보를 전제로 다가가고 있다. 현 추세대로라면 미국과 북한의 국교수립도 멀지 않았다. 이는 2. 13 북핵합의가 몰고 온 변화이자 미국의 대외정책에도 엄청난 지각변동이 있다는 것을 예고하고 있는 대목이다. 북한이 중국처럼 시장개방을 하는 것도 시간문제일 뿐, 이를 부정하지는 않고 있다. 일부에서는 5년 이내로 전망하고 있다. 이런 판국에 멸공사상만 고집하던 기존의 대북관에 얽매어 한반도 변화의 주도권을 어떻게 잡을 수 있겠는가. 미국이 지금껏 취해왔던 대북 정책을 전면 포기하고 테러지원국이 아닌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북한을 안아버린다면, 다음은 누가 대북 주도권을 잡느냐는 과제가 떨어지게 된다. 6자회담에 참가하는 각국 모두가 각축의 주역이다. 이때 한국이 과연 주도권을 행사할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가. 2. 13 합의 앞에서도 "한국만이 비용을 부담해서는 안 된다"는 소극적 주장만을 반복하고 있다. 이에 반해 중국은 수 십 년간 지속해온 혈맹관계에 기초, 통 큰 선물을 준비하고 있다. 북한 김정일 정권 붕괴이후를 대비한 행보다. 그런데도 지금처럼 소극적이고도 미온적인 태도로 북한을 흡수, 남북통일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은 환상이다. 여야를 떠나 북한체제 붕괴 다음을 대비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리고 시간이 많지도 않다. 북한 전문가이자 저격수라는 한나라당 정형근 의원이 최근 '대북정책 전환 필요성'을 들고 나온 것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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