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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도자들은 대체로 삶의 등대 역할을 하는 사자성어 하나쯤을 가지고 사는 모양이다. 얼마 전 삼성경제연구소가 우리나라 사회지도급인사들이 좌우명을 사자성어로 정리해 발표한 내용 중 1위로 올라 있는 사자성어는 흥미롭게도'순망치한(脣亡齒寒)'이었다. 순망치한은 중국 춘추전국시대 진나라와 우나라와 괵나라에 얽힌 이야기에서 유래된 사자성어이다. 순망치한은 진나라 헌공이 괵나라를 치려고 우나라 우공에게 길을 열어 달라고 하자, 우나라 중신 궁지기가 괵나라가 망하면 우나라도 온전할 리가 없다면서 우나라 우공의 어리석음을 깨우친 말에서 유래했다. 오늘의 언어로 바꾸면 "세상은 혼자 살아가지 못하는 법"이라는 말쯤 될지 모르겠다.


 오늘도 그렇지만 옛 사람들, 특히 정치인들에게 관계란 매우 중요한 '아이콘'이었다. 정치에서 관계는 내부적으로 연합이나 연맹이고, 대외적으로는 외교로 드러난다. 중국의 혼란기였던 춘추전국 시대는 '관계'라는 아이콘이 정치가의 존망을 가르기도 했지만 한 나라의 흥망이 달려 있는 중요한 문제였다. 이 때문에 관계에서 비롯된 수많은 사자성어가 춘추전국시대를 배경으로 만들어졌는지도 모른다. 우나라의 중신 궁지기가 우공의 어리석음을 이야기 하면서 순망치한을 거론한 것도 관계의 중요성을 바탕으로 내일을 대비하려는 지혜의 전략이었다. 오늘을 사는 우리시대 지도자들이 다른 사자성어를 뒤로 미룬 채 순망치한을 선택한 것은 이런 점에서 매우 의미 있는 사실이라 할 수 있다. 


 정치인들은 곧잘 관계의 중요성을 역설하면서도 결국엔 자신의 아집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독선적인 행태를 보이기도 한다. 조선조 7대 임금 세조의 경우가 그랬다. 그는 '이가 없으면 잇몸이 시리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끝까지 단종 복위세력에 대한 회유책을 폈다. 문제는 세조의 회유책이 미래를 위한 대의가 아니라 자신의 왕권 찬탈이라는 비난을 피해가려는 일종의 왕권 정당성 확보 차원의 회유책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성삼문, 박팽년 등 이른바 사육신은 아무도 그를 왕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결국 참형으로 명분과 함께 역사의 뒷마당에 묻혔다. 세조의 정치가 훗날 비판의 대상이 되고 당대에서도 집권 후반기에 숭유억불책을 뒤로 한 채 불교에 의지했던 것도 '시린 이'를 달래기 위해서였지만 죽음까지 '시린 이'를 감싸 안고 간 것 만 봐도 순망치한의 교훈은 되새겨 볼만한 대목이다.


 대선을 100일 앞두고 사방으로 흩어진 정치권도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여권의 유력주자인 손학규 후보와 정동영 후보는 '민심천심(民心天心)'과 '구동존이(求同存異)'를 전면에 걸었고 한나라당의 대선후보로 확정된 이명박 전 서울시장은 일찍부터'한천작우(寒天作雨)'를 대선행보의 로드맵으로 설정했다. 민심천심과 구동존이를 내건 여권의 두 후보가 여론조사 도입을 두고 갈등을 빚는 모습은 다르지만 '나와 같음'을 추구하는 것이나 민심을 '나의 마음'으로 해석하는 우를 범하는 것이 아닌지 걱정스럽다.


 이명박 후보의 경우 가뭄에 씨까지 말라죽게 하는 오늘이 지나면 하늘은 내일 비를 만들어 대지를 적신다는 '한천작우'를 내걸고 대권을 향한 야심을 드러내고 있다. 오늘은 '한천'으로 인식했다면 '작우'를 위한 실천적인 행동이 필요하다. 입술이 없으면 이가 시린 법인데도'시린 이'를 안고 진통제로 견디는 현실인식이라면 비는 고사하고 마른 땅이 갈라지는 소리만 요란할 것이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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