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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운대 버금가던 풍광 '망선대'라 이름짓고 시로남겨
[울산땅 옛글의 향기] 9.면앙정(仰亭) 송순(宋純)
2011년 07월 14일 (목) 21:12:57 김종경 kimj@ulsanpress.net

송순(宋純)은
우리 나라 가사문학(歌辭文學)의 큰 봉우리이다.
그 빛에 가려 그가 현실주의적인
애민정신을 가진
문인학자였다는 사실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백성의 고통과 아픔을 직시하고,
그릇된 현실을 바로 잡으려고
줄곧 힘을 쏟았다.
'하늘을 우러러 보고[ ], 땅을 굽어보다[仰]'란
삶의 모습에서 짐작하기가 어렵지 않다.
'면앙( 仰)'은 그가 지은 정자의 이름이자,
호(號)로 평생의 지침이었다.

   
▲ 현재 현대자동차가 위치한 양정동에서 바라본 바다 건너편의 영남화력(가운데 굴뚝)과 울산 본항의 모습. 영남화력 자리의 망선대에서 바라볼 수 있는 울산항과 태화강의 풍광이 짐작된다.

'전가원(田家怨)'이란 시를 보자. "작년 양식은 이미 떨어지고/ 새로 핀 이삭 여물 날 언제런지./ 날마다 서쪽 언덕의 나물 뜯지만/ 허기를 채우기에 부족하다./ 아이들 배고파 보채는 거야 참는다지만/ 늙으신 부모님 어찌 하리오./ 아전이란 도대체 어떤 놈들이기에/ 공세 바치라 닥달하고 뜯어만 가네./ --중략(中略)-- / 하늘에 죽여달라 부르짖지만/ 들어줄 사람 뉘 있으랴/ 슬프고 슬프구나 구원받지 못해/ 쌓인 시체가 빈 구렁을 메우네." 그는 엄혹한 현실을 외면하지 않은 비판의식을 지닌 선비였다.

 조선 중종(中宗) 35년(1540년) 가을 어느 날, 경상도 관찰사이던 송순(宋純)은 울산에 들렀다. 그 전 해에 승정원 우부승지로 있다가, 마흔여덟이던 그 해에 경상도 관찰사로 나왔다. 다음해에 대사간으로 옮겨 갔다. 1년의 짧은 기간 경상도 관찰사로 있으면서도 백성들의 고단한 생활을 살피기를 잊지 않았다. 울산에 들러 며칠을 지냈다. 그가 남긴 몇 되지 않는 시편들이 알려준다. 태화루에 올랐다. 시를 지으려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하루 밤을 머물며 울산 고을의 정경을 읊었다. 울산시가 1999년에 펴낸 한시집 '태화강에 배 띄우고(송수환 번역)'에 실려 있다.

48세에 경상도 관찰사 부임
울산 태화루 등 찾아 詩 읊어
우리말 시가 작품 남겨 주목

 "바다에 닿은 하늘, 땅은 남쪽 끝/ 나뭇잎은 갓 물들어 서풍에 휘날리네./ 태화루에 올라도 시 한편 못 지으니/ 달빛 아래 술잔도 흥을 돋우지 못하누나./ 들녘 가을빛은 씻은 듯이 해맑고/ 강에 비친 산 그림자는 정녕 맑기도 하여라./ 바닷길은 저 멀리 은하수에 닿았다지/ 그 누가 신선 좇게 돛을 활짝 밀어줄까." '울산의 가을날'이란 제목으로 실렸지만, 원래의 제목은 '차울산동헌운(次蔚山東軒韻)'이다. 언양에도 들러, '언양 동헌(次彦陽東韻)'이란 시를 남겼다. "시냇물 외길 따라 숲 속으로 들어가고/ 현청은 고요하여 절간처럼 한가하네./ 마음은 상쾌하고 할 일도 별로 없어/ 종일토록 얼굴 들어 남산을 바라보네."

 그는 워낙에 문인으로서의 위상이 높아 다른 것은 눈에 잘 띄지가 않았다. 아홉 살 때 새를 갖고 놀다가 새가 죽자 '곡조문(哭鳥文)'이란 시를 지었다. "我人也/ 汝鳥也/ 鳥死人哭/ 義爲不可/ 汝由我而死/ 是以哭之 (나는 사람이고/ 너는 새이니/ 새의 죽음을 사람이 곡하는 것은/ 맞지 않으나/ 네가 나 때문에 죽었으니/ 이 때문에 슬퍼하노라."

 어릴 때부터 문학적인 자질을 내보인 그의 문학세계는 우리 말로 된 시가(詩歌), 즉 시조를 남겼다는 점에서 큰 주목을 받았다. 한문작품은 문집 '면앙집에 실렸지만, 시가는 연보(年譜)나 가장(家狀)에 전하고 있다. 오륜가(五倫歌) 5편과 면앙정 장가(長歌) 1편, 단가(短歌) 7편, 잡가(雜歌) 2편, 농가(農歌) 1편 등이다. 시가는 다른 사람의 문집에도 들어 있어 그의 작품으로 추정할 수 있는 것은 대략 11수라고 한다.

   명종 임금이 궁중에 핀 황국화를 꺾어 옥당관에게 주면서 노래를 지어 바치라고 했다. 마침 숙직하던 그가 노래를 지어 올렸다. '자상특사황국옥당가'이다. "풍상(風霜)이 섞어 친 날에 갓 피온 황국화(黃菊花)를/ 금분(金盆)에 가득 담아 옥당(玉堂)에 보내오니/ 도리(桃李)야 꽃인 체 마라 님의 뜻을 알괘라." 을사사화로 수많은 선비가 죽임을 당한 것을 보고 지은 것이 '상춘가(傷春歌)'다. "꽃이 진다 하고 새들아 슬퍼마라/ 바람에 흩날리니 꽃의 탓 아니로다/ 가노라 희짓는 봄을 시샘하여 무삼하리오."

 자연에 파묻힌 무욕(無慾)의 삶이 드러난 작품도 썼다. 자연과 합일된 달관의 삶을 엿볼 수 있다. "넓으나 넓은 들에 시내도 김도 길샤/ 눈 같은 백사(白沙)는 구름같이 펴 있거든/ 일 없은 낙대 든 분네는 해 지는 줄 몰라라." "십년(十年)을 경영(經營)하여 초려(草廬) 한 칸 지어내니/ 반 칸은 청풍(淸風)이요 반 칸은 명월(明月)이라/ 강산(江山)을 들일 듸 없으니 둘러 두고 보리라." 그에게 자연은 은둔의 도피처가 아니라, 기쁨의 열린 공간이었다. 벼슬길에서 스스로 물러났기 때문에 가능했다. 자연을 현실과 거리감이 있는 닫힌 공간으로 여기는 다른 선비들과 차이점이다. 

 송순은 성종 24년(1493년) 전남 담양군 봉산면 상덕리 기촌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태(泰), 어머니는 순창 조씨. 선조 15년(1582년) 90세로 세상을 떠났다. 관향은 신평(新平). 자는 수초(遂初), 성지(誠之). 호는 기촌(企村), 면앙정. 시호 숙정(肅定).

어릴때부터 남다른 문학 자질
조선성리학 대가 눌재 박상 등
형제를 스승으로 가르침 받아

 21세 때 눌재(訥齋) 박상(朴祥), 육봉(六峯) 박우(朴祐) 형제에게 배웠다. 형제를 스승으로 둔 것은 드문 일이다. 눌재는 길재-김종직-김굉필-조광조로 이어지는 조선 성리학의 학통을 잇는 인물. 눌재에 대해 "아득한 앞길 동(東)인가, 남(南)인가/ 스승 좇으니 즐겁고 편안하네/ 맑은 바람 내게 불어오지 않았다면/ 어찌 일생에 아둔함 면했겠는가"라며 기렸다. '스승의 가르침이 없었다면 지금까지 어디로 가야할지 몰라 헤매고 있었을 것이다. 스승의 가르침을 받으니 즐겁고 편안하기만 하다'고 했다. 그의 지극한 마음을 볼 수 있다.

 26세 때에는 취은(醉隱) 송세림(宋世琳)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취은에게서 학문은 물론이고, 뒷날 그의 대표작 '면앙정가( 仰亭歌)'를 지을 수 있는 토대를 마련했다. 취은에게서 불우헌(不憂軒) 정극인(丁克仁)의 작품 '상춘곡(賞春曲)'을 비롯한 여러 작품을 자주 보면서 시가에 대한 감각을 익혔다. 비로소 국문시가의 창작 기틀을 갖췄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중종 14년(1519년) 27세에 문과에 급제해 승문원 권지부정자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나섰다. 다음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마친 뒤 여러 관직을 거쳤다. 중종 28년(1533년) 41세에 김안로(金安老)가 권세를 잡자, 고향에 돌아와 은일한 삶을 즐겼다. 4년 뒤 벼슬길에 다시 올랐다. 승정원 우부승지, 경상도 관찰사, 사간원 대사간 등을 역임했다. 명종이 즉위하면서 권세를 잡은 윤원형 일당에 맞서다 전라도 관찰사로 좌천됐다. 이듬해 한성부 우윤으로 복귀해 대사헌을 거쳐 이조참판에 있을 때, 간신배들의 모함으로 충청도 서천을 거쳐 평안도 순천으로 유배됐다.

 77세인 선조 2년(1569년)에 한성부 판윤을 거쳐 우참찬이 된 뒤, 50여년간의 벼슬길에서 물러났다. 고향에 돌아와 면앙정에서 안빈낙도의 여생을 즐기다 편안하게 잠을 자듯이 세상을 떠났다. 향년 90세. 문집으로는 한시 500여 수 등이 실린 '면앙집( 仰集)'이 있다. 담양 구산사(龜山祠)에 배향됐다. 수많은 문인학자를 키웠다. 문묘에 배향된 김인후(金麟厚)와 기대승(奇大升), 임형수(林亨秀), 박순(朴淳), 고경명(高敬命), 정철(鄭澈), 임제(林悌), 임억령(林億齡), 양산보(梁山甫),김성원(金成遠) 등이다.

 그의 삶은 '면앙( 仰)'과 '관용(寬容)'으로 요약할 수 있다. 면앙은 '맹자(孟子)'의 "하늘을 우러러 부끄럼이 없고(仰不愧於天), 땅을 굽어보아도 부끄러움이 없다(俯不於人)"에서 나왔다. 스스로 수양해서 자아완성을 하는 큰길을 걸어야 함이다. 관용의 관(寬)은 '이아(爾雅)'에서 "너그럽다, 도량이 크다"는 뜻을 갖고 있다. 용(容)은 "수용하다, 받아들이다, 용서하다"는 뜻을 갖고 있다. 관용이란 남을 먼저 배려하는 마음을 갖춰야 함이다. 두 아들의 이름 끝 자를 관용을 따서 '해관(海寬)'과 '해용(海容)'이라고 붙인 것에서 관용을 실천하려 한 굳센 의지를 읽을 수 있다.

    정자 '면앙정( 仰亭)'은 41세 때(중종 23년, 1533년) 지었다. 성수침(成守琛)에게서 편액을 받았다. '면앙정삼언가( 仰亭 三言歌)'를 지었다. "有地 굽어보면 땅이요/ 仰有天 우러르면 하늘이라/ 亭其中 그 가운데 정자 지으니/ 興浩然 흥이 절로 넘치누나/ 招風月 풍월을 부르고/ 揖山川 산천을 끌어들여/ 扶藜杖 명아주 지팡이에 의지하여/ 送百年 한평생을 보내노라."

 관직생활에 바빠 20년간 제대로 돌보지 않아 심하게 낡았다. 60세 때(명종 7년, 1552년) 담양부사 오겸(吳謙)의 도움으로 크게 고쳤다. 뒷날 대학자가 된 26세의 기대승이 송순의 부탁을 받고 '면앙정기( 仰亭記)'를 지었다. 임진왜란 때 불타 후손들이 효종 5년(1654년)에 새로 지었다.
 1989년에 대대적으로 손짓했으나, 원형은 보존되고 있다. 현재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중앙에 한 칸짜리 방이 있다. 사방 마루가 깔려 있어 어느 쪽에서나 주변의 경치를 볼 수 있는 구조로 짜여져 있다. 전라남도 기념물 제6호. 모습은 옛 그대로이지만, 주변의 경치는 사뭇 달라졌다. 무등산의 여러 지맥과 하얀 모래밭 등은 세월 따라 변했기 때문이다.

시가 문학 근원지 면앙정 지어
정철 등 유명한 문인학자 배출
호 '면앙' 평생 지침으로 삼아

 그가 지은 '면앙정가( 仰亭歌)'는 자연에서 얻는 흥취를 사계절의 변화에 따라 읊은 가사(歌辭). 면앙정의 지세(地勢)에서부터 제월봉의 형세와 면앙정과 사계절의 경치, 그리고 자신의 열린 마음에서 임금에 대한 연모의 정까지를 짜임새 있게 묘사했다. '무등곡(無等曲)'이라고도 불린다. 그만큼 무등산과 관련이 깊다. 면앙정이 있는 제월봉이 무등산에서부터 연유함이다.

 무등산을 맨 먼저 언급하면서 146구로 된 면앙정가는 시작된다. "무등산 한 줄기 산이 동쪽으로 뻗어 있어,/ 멀리 떨치고 나와 제월봉이 되었거늘,/ 끝없는 넓은 들에 무슨 생각 하느라고,/ 일곱 굽이 한데 뭉쳐 우뚝우뚝 펼쳤는 듯,/ 가운데 굽이는 구멍에 든 늙은 용이/ 선잠을 막 깨어 머리를 얹은 듯, 너른 바위 위에/ 송죽을 헤치고 정자를 앉혔으니/ 구름을 탄 푸른 학이 천리를 가려고/ 두 날개를 버린 듯,/ --후략(後略)--."

 면앙정은 호남 제일의 가단(歌壇)을 형성한 곳이자, 시가문학의 근원지. 이황(李滉)과 윤두수(尹斗壽), 소세양(蘇世讓), 정철, 김인후, 고경명, 임제, 임억령, 양산보, 노진 등 수많은 선비가 드나들면서 시를 지었다. 면앙정을 소재로 한 시가만도 600여 수에 이른다. 한시가 주류를 이루지만, 우리 말로 된 가사도 20여편이 된다. 한 곳을 대상으로 그렇게 많은 작품이 나온 것은 흔치 않은 일이다. 그의 폭 넓은 교유와 면앙정의 자연경관이 어우러져 이뤄졌다. 면앙정 30경(景)이 있었다. 제자 김인후와 고경명, 임억령, 박순 네 사람이 30경을 읊은 '면앙정삼십영( 仰亭三十詠)'이 전한다. 근래 담양문화원이 '면앙정삼십영' 사진작품집을 펴냈다.

   
▲ 조선 중종때 경상도 관찰사 송순이 울산을 찾은 길에 들러 이름을 지어 주었다는 망선대는 옛 남구 매암동 양죽마을 동북쪽에 있었던 범바위 끝, 즉 망제산 정상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사진은 지난 1967년 영남화력 조성 당시로 오른쪽 하단이 망선대 추정지이지만, 발전소와 부두조성으로 지금은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
   송순은 울산을 찾은 길에 망선대(望仙臺)에 올라 시를 지었다. 한시집 '태화강에 배 띄우고'에 소개돼 있다. '시서(詩序)'에 "좌병영 남쪽 30리 쯤에 대(臺)가 있어 넓은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니, 해운대와 으뜸을 다툰다.

하루는 병사 장세호 공(公), 수사 봉승종 공과 함께 울산 앞 바다에서 배를 타고 염포를 지나 곧 바로 대 아래로 갔다. 이 날은 마침 날씨가 화창하여 대에 올라 구경하기가 좋았다. 좌우 사람들이 모두 대에 아름다운 이름이 없는 것을 흠이라 하여 내가 '망선대'라 이름 짓고, 절구 두 수를 지었다. 장세호 공이 이를 새겨 병영 동헌에 걸고 영세토록 전하고자 하였다."

 시 '망선대(望仙臺)'는 이렇다. "멀리 바다 밖에 삼산이 아득한데/ 열두 누대 아래 유람선이 매여 있네./ 머잖아 동풍이 내게로 불어오면/ 달 밝은 대(臺) 위에서 오는 신선 맞겠지.// 태화루 아래에서 세 사람이 손 맞잡고/ 염포 앞 바다에 한 척 배를 띄웠네/ 맑은 바람 화창한 날씨, 바다도 드넓은데/ 망선대 오른 사람들, 누가 우릴 신선 아니라느냐."

 그렇다면 망선대는 어디인가 남구지명사에 의하면 매암동 양죽(楊竹)마을의 동북쪽에 있었던 범바위끝, 즉 망제산(望帝山) 정상의 돈대(墩臺)였다. 동쪽 바다를 향한 망제산의 정상이 넓고 평평하고, 전망이 무척 뛰어나 예부터 봄이면 부녀자들이 화전놀이를 즐기던 곳이었다. 울산항 부두건설로 오래 전에 사라졌다. 해운대는 지금도 그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고 있지만, 망선대는 사라졌으니 아아! 정녕 안타까운 일이 아니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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