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권정생 선생의 향년은 우리 나이로 따지면 71세다. 그의 인생을 돌아보면 20세가 되기 전에 철저하게 망가졌다. 유민으로 떠돌며 가난과 불행의 연속선상에서 가까스로 버티는 형국이었다. 두 번의 전쟁을 겪었고, 두 번의 식민지를 경험하며 외로움 속에서 지냈다. 20세 후부터 돌아가실 때까지는 오줌주머니를 평생 한 몸처럼 지니고 있었다. 병마와 동숙하며 일직면 조탑리 빌뱅이 언덕 아래서 인생의 대부분의 시간을 살아냈다. 마치 뿌리가 있는 사람처럼 그곳을 좀처럼 떠날 수도, 떠나지도 않은 채 살 수밖에 없는 몸이었다.
 평생 외로울 수밖에 없는 천형을 받은 것처럼 몸은 부자유스럽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정신세계는 더없이 높고 맑아서 너무도 자유롭고 자재했다. 앉아 천리, 서서 만리를 내다보는 눈, 세상과 자연과 인간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은 어느 누구도 모방할 수 없는 성질의 것이었다.

 어린 시절 일본에서 겪은 2차 대전과 청소년기를 살라먹은 한국전쟁은 선생에게 깊은 상처를 입혔다. 전쟁 속에서 자연과 인간이 파괴되는 것도 아픔이었지만, 그 속에서 어떻게 인간성이 굴절되고 뒤틀리며 깨어지는가를 목격하면서 무척 고통스러워했다. 평생 세상의 평화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자연의 조화로운 삶을 염원한 것도 이 두 번의 전쟁이 가져다 준 깨달음이었다.
 베트남, 팔레스타인, 이라크 전쟁을 선생은 분명히 반대했으며, 직접 혹은 간접으로 관여한 미국의 패권주의에 가차 없는 비판을 가했다. 전쟁은 멀쩡한 사람들이 폭력의 도구가 되는가 하면, 그로 인해서 죄 없는 사람들이 속절없이 무너져 내리기도 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그는 두려워했다. '몽실언니' 등이 그런 인간군상을 그린 대표적인 작품이다.
 특히 한국전쟁을 다루는 작품들에서는 민족이 어떻게 나누어져 갔는지, 그래서 우리들의 삶은 또한 어떻게 일그러져 갔으며, 통일은 또 어떻게, 왜 해야 하는지를 지극히 인간적인 관점에서 풀어냈다. 반공이데올로기 일색이던 엄혹한 군사독재 시절에도 굽히지 않고 제 목소리를 풀어내면서 핍박과 주목을 한꺼번에 한 몸으로 받아내었다.

 세상을 보는 선생의 눈과 마음은 언제나 어린이와 같았다. 딱 그만큼의 높이에서 그 정도의 맑은 눈빛으로 인간과 자연을 이야기했다. 습지식물도 향일성을 지닌다고 했던가. 선생은 어둡고 습하고 그늘진 곳의 아이들을 사랑했다. 슬프고 외롭고 아쉬운 아이들을 언제나 주인공으로 앉히고 나눔과 사랑과 평화의 세계를 불러내어 위로하며 소박한 햇볕을 나누어 주었다. 보잘 것 없고 하잘 것 없을수록 더 빛나는 주인공으로 만드는 능력은 아무나 범접할 수 없는 독보적인 것이었다. 이러한 내용을 담은 작품이 많지만 '강아지똥'하나면 설명은 충분할 것이다.
 1969년 월간 《기독교교육》현상공모에서 '강아지똥'이 당선되었다. 이 작품은 1966년 부산대학병원에서 콩팥적출과 오줌주머니를 차는 수술을 받고 2년이라는 시한부 선고를 받은 후 쓴 것이다. 남의 나라에서 태어나 디아스포라로 분류되며 마이너리티로 떠돌다가 귀국한 후 전쟁과 가난, 10여년 투병으로 이어진 고난에 찬 삶을 마감하는 유언과도 같은 글을 쓴 것이었다.
 이 글에 나오는 '강아지똥', '흙덩이''감나무 가랑잎'은 자신의 분신들이고, '소달구지', '닭'은 자신을 일그러뜨린 전쟁과 수탈의 상징들이다. 제국주의 침탈과 전쟁의 폭력 앞에 속절없이 만신창이가 된 자신을 표현한 것이다. 누구도 돌봐주지 않는 외톨이었던 자신을 '강아지똥'으로, 소달구지라는 역사의 수레바퀴에 이끌려 남의 땅에 떨어졌다가 역사의 윤화(輪禍)를 입기 직전 기사회생하여 본토로 돌아온 자신을 '흙덩이'로 나타냈다.

 그는 이대로 죽기에는 너무 억울해서 동화를 썼다고 한다. 강아지똥의 입을 빌어 하느님은 쓸데없는 물건은 하나도 만들지 않았다고 자위하는가 하면, 우리가 모두 떨어져 죽어야만 엄마는 내년 봄에 아기 이파리를 키운다는 감나무 가랑잎의 말을 빌어 죽음을 받아들인다. 선생은 이 모든 뒤틀린 자아를 녹여 별로 환생하는 꿈을 민들레꽃으로 승화시킨다.
 자신의 삶을 무언가 쓸모 있는 것으로 바꾸려고 쓴 작품이 기도가 된 것일까. 선생은 오물덩이 인생의 종지부를 찍고 민들레별로 환생했다. 헐거워진 육신을 오로지 맑은 정신으로 채우며 평생 자신을 닮은 수많은 강아지똥을 위로하는 글을 쓰다 갔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