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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알프스는 지금 곱고 화사한 색동치마를 입었다. 정상 억새밭에서 시작된 단풍은 어느새 산 전체를 뒤덮었다. 7부 능선 위로는 벌써 나뭇잎을 다 떨어뜨린 앙상한 나무들이 가득해 겨울 산처럼 보인다. 예년 같으면 지금 11월 초순이 단풍이 절정이다. 하지만 올해는 다른 것 같다. 여름내 잦은 비로 생장에 장애를 받은 탓인지 나뭇잎이 쉬 떨어져 나가 버렸다. 특히 10월 마지막 주말 울산지역에 내린 때 아닌 폭우(평균 30mm)로 인해 영남 알프스 단풍의 질이 예년에 비해 많이 떨어진다.

   
10월말 영남알프스에 내린 가을 폭우를 거뜬하게 이겨낸 단풍나무 잎들이 수줍은 빛으로 단풍 계곡길을 살갑게 하고 있다. 사진은 용주암 앞 계곡에서 붉게 물든 단풍나무.


#완만한 경사로 가족 단풍나들이에 제격
영남알프스의 가을 단풍은 억새 못지않게 전국적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10월 중순부터 11월 중순까지 정상부에서 서서히 산 아래로 내려가는 단풍 띠는 억새의 향연을 보기위해 찾은 산악인들을 황홀하게 하는 또 다른 볼거리다. 특히 배내봉에서 간월산에 이르는 하늘 억새길5구간, 운문재에서 쌀바위를 거쳐 가지산 정상으로 가는 산행 구간에서 울산시가지 쪽으로 조망하는 단풍산의 아름다운 풍광이 압권이다. 배내골 청수골에서 시작해 영취산으로 오르는 하늘억새길 2구간, 청수골에서 사자평 재약산 수미봉 사자봉으로 이르는 하늘 억새길 3구간에서 맞는 단풍도 일품이다.
 

 하지만 이들 구간은 하루를 온전히 투자해야 하는 쉽지 않은 산행길이어서 가족 단위로 움직이기 쉽지 않다. 영남알프스 깊숙한 곳에는 아이들과 함께 쉬엄쉬엄 다녀올 수 있는 '단풍 산책길'이 몇 있다.
 석남사 계곡은 가장 쉽게 접근할 수 있는 단풍 산책길이다. 사찰 진입로에서 계곡을 따라 색 고운 단풍이 즐비하다. 영남알프스의 속살인 배내골로 들어가면 파래소폭포를 품은 계곡 산책길도 가족들과 단풍을 즐기기에 좋다. 이천리 철구소에서 주암마을에 이르는 계곡 산책길도 지금 단풍이 한창이다.
 10월의 끝자락, 철구소에서 출발해 주암마을에 이르는 '단풍산책길'을 다녀왔다.


#이무기 전설 간직한 철구소
단풍 산책은 철구소에서 시작했다. 철구소는 배내재를 넘어 이천리쪽 내리막 끝 부분에서 만날 수 있다. 철구소 이정표를 따라 개울을 건너 숲 속으로 조금만 들어가면 관광객들의 편의를 위해 세운 구름다리가 나온다. 구름다리 위에서 보이는 거대한 소(沼)가 바로 철구소다.
 철구소는 밀양의 호박소, 파래소 등과 함께 영남알프스의 3대 소이다. 파래소와 철구소, 밀양의 호박소는 그 밑이 서로 연결되어 있어 선녀들이 목욕하러 내려올 때면, 이무기가 그 밑을 통해서 자리를 피해줬다는 전설이 있다.
 옛날에 배내골에서는 추수가 끝나고 나서 마을 잔치를 벌였는데, 이때 개울가의 물고기를 잡아 추어탕도 끓이고 생선 튀김, 생선회 등을 주로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절구를 닮았다는 철구소로 힘차게 내리는 물줄기. 시원한 계곡 산책길의 백미다.

 어느 해 가을날 예전과 같이 고기를 잡으려고 초피나무(재피나무 또는 산초) 껍질을 벗겨 말린 후 절구통에 잘 부순 후에 다시 볶아서 부드러운 베자루에 넣고 철구소 위쪽에 담가 놓고 발로 밟아 물에 풀었다고 한다. 보통은 10분이면 고기가 죽어서 나오는데 그날따라 물고기가 한 마리도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은 웅덩이가 크고 깊어서 고기가 안 나오는가 생각하여 초피나무 껍질 가루를 3말 더 풀었는데, 30분 이상 지나자 물웅덩이에서 회오리가 일고 큰 소리가 나면서 물에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내려가 확인해 보니 엄청난 길이의 이무기 한 마리가 떠오른 것이었다. 이 이무기의 길이가 7m 이상 되어 힘센 어른도 들어낼 수 없어 7토막을 내서 어른 7명이 산에 묻고 내려왔다. 그 다음 해부터 배내골에는 불이 자주 나고 흉년이 3년이나 지속되고 학교가 불타는 일까지 일어났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이무기가 묻힌 곳을 찾아가 큰 제사를 올리고 용서를 빌고 나서야 재앙이 일어나지 않았다고 전한다.
 전설 속 이무기의 크기처럼 철구소의 깊이는 대략 7m 에 이른다고 한다.  철구소는 소의 모양이 좁고 깊은 절구 모양이라 처음에는 절구라 불렀을 것이다. 이후 절구가 철구로 변경되고 철구로 굳어져서 철구소라 부르게 됐다.


#한편의 수묵화
구름다리를 지나 계곡 쪽으로 좀 더 들어가면 용주암이란 절집이 있다. 절집 돌담 앞에서 온 길을 되돌아보면 철구소와 함께 거대한 암벽이 장엄한 모습으로 서 있다. 계곡 끝자락 까지 내려온 단풍과 철구소와 암벽이 한편의 수묵화다.
 용주암에서부터는 차량이 다닐 정도의 산책하기 맞춤인 길이다. 철구소에서 들어오는 길이 없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주암마을 쪽에서 온 임도일 듯하다. 
 

   
계곡물에 가득한 나뭇잎.

 길을 걷는 동안 계곡 물소리가 청명하다. 지난 주 내린 가을 폭우 탓에 계곡물이 제법 많다. 가을 겨울 산행 중 이렇게 물이 많은 것도 처음 보는 것 같다. 폭우는 계곡 주변의 참나무와 이름을 알 수 없는 나무들의 잎을 거의 다 떨어뜨리고 말았다. 벌써부터 앙상한 가지만 남은 나무들도 눈에 많이 띈다. 단풍 산책길을 소개하기 위해 몇 주 동안 준비해 왔던 것을 생각하니 속이 상한다. 폭우 때문에 계곡 주변은 예년 같으면 단풍이 거의 끝나는 11월 중순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의 손을 닮은 단풍나무는 가을 폭우를 거뜬하게 견뎌낸 모양이다. 오솔길과 계곡 곳곳에 수줍게 얼굴을 붉힌 단풍이 곱고 화사한 모습으로 자리 잡고 있다. 색 고운 단풍을 맞으러 가는 길은 언제나 새색시를 맞는 듯 가슴 설렌다. 파란 하늘 아래 계곡과 폭포를 품은 단풍이라면 금상첨화다. 자연이 부려놓은 아름다운 풍광에 넋이 나가기 마련이다.


#쉬엄쉬엄 걸어 1시간 30분 코스
붉은 단풍이 매혹적인 곳을 찾아 계곡으로 내려섰다. 물 흐름이 멈춘 곳엔 어김없이 수많은 단풍잎이 모여있다. 형형색색 나뭇잎 위로 물이 흐르고, 그  물위에 햇살이 차분히 내려앉아 작은 물비늘을 만들고 있다. 여기에 신선한 바람과 가을 향기가 더해지면서 계곡을 더욱 살갑게 만든다.
 30분쯤 오르면 너른 길은 콘크리트 보를 지나 계곡 반대편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그 길을 한 번도 간 적이 없어 어디로 이어지는지 알 수가 없다. 차량통행이 있을 만한 주거용 건물이 있는 것으로 보아 주암마을 쪽으로 연결된 듯하다.
 

   
 발끝에서부터 '바스락'소리가 들리는 오솔길.

 산행은 콘크리트 보를 넘지 않고 곧장 이어진 오솔길을 택했다. 낙엽이 많아서 인지, 오솔길이 보이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길을 잃어버릴 이유는 없다. 계곡 옆을 따라 가다보면 쉽게 사람이 다닌 흔적을 찾게 마련이다. 오솔길에선 낙엽 밟는 소리가 발끝에서부터 전해져온다. 그러다 어느 순간 마음이 발끝으로 떨어진다. 손을 뻗어 모양 좋은 노란 나뭇잎을 주워 코에 가져다 본다. 가을 냄새다. 그 냄새는 여름 내내 초록빛에 가려져 있었을 것이다. 그 때 갑작스러운 바람이 불고, 흥이 난 단풍들이 춤을 춘다. 춤바람이 심하게 난 녀석들은 그만 붙잡고 있던 가지를 놓쳐 버리고 낙엽이 된다. 이번에 방금 떨어진 빨간 잎을 주워 코로 가져간다.
 

 떨어진 나뭇잎을 줍는 사이 어느새 주암마을이다. 마을과 가까운 계곡의 바위에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가족의 모습이 보인다. 아이들은 자라서도 이 빛나는 가을날을 잊지 않을 것 같다.
 평일인데도 주암마을 주차장에는 가을 산행에 나선 이들이 세워둔 차량들로 가득하다. 주차장에서 난 가파른 산길을 오르면 재약산 삼종태바위로 곧장 올라갈 수 있다. 이 길을 따라 가면 주암계곡의 단풍을 더 절절히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가족과 함께할 수 있는 '계곡산책길'은 여기까지다. 사진촬영을 하며 쉬엄쉬엄 걸은 탓인지 1시간 30분가량이 걸렸다. 아마 아이들과 함께 느릿하게 걸어도 두 시간이 채 걸리지 않을 것 같다. 글=강정원기자 mikang@ 사진=이창균기자 pho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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