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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일 아침이었다. 텔레비전 오락프로그램에 정신을 팔고 과일을 깎다가 실수로 왼손 손바닥을 세게 찔렀다. '악' 소리를 쳤다. 금방 선홍빛 피가 살갗 틈새를 타고 몽글몽글 솟아올랐다. 손을 움켜쥐면서 결코 작은 상처가 아님을 직감했다. 소파에 기대어 귀 잠을 자던 남편이 올빼미 눈으로 벌떡 일어나 두루마리 화장지를 휘휘 풀어 상처에 갖다 대고 동네 병원을 향했다.

 몸보다 마음이 먼저 찾은 병원 문 앞에는 '휴진' 안내가 대문짝만 하게 붙어 있었다. 저만치 떨어진 길 건너 병원도 '휴진' 이기는 마찬가지였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때의 난감함이라니…. 핸들을 돌려 대로변 종합병원 응급실로 갔다. 아무리 급한들 순서를 거슬러야 기회는 주어지는가 싶었다.
 응급실 앞에는 환자들로 북적였다. 목발을 짚고 연방 마른기침을 하는 늙수그레한 남자, 어디가 불편한지 얼굴에 핏기가 가신 젊은 새댁, 엄마 등에 업혀 멀건 콧물을 흘리며 '앙앙' 울어 재끼는 아기는 또 얼마나 수선스럽든지….

 마음이 급했다. 순서를 기다리자니 속이 터졌다. 남편은 시선을 이리저리 던지며 좌불안석이었다. 막무가내로 도움을 요청해볼까도 싶었지만, 그럴 용기는 더욱 없었다. 저만치 응급실 안을 기린 목으로 들여다보니 환자를 돌보는 의사와 간호사가 눈에 띄었다. 누군가가 내 급한 사정을 알아주기라도 했으면  싶을 적에는 손을 더 감싸 쥐었다.
 간절하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난데없이 맨 앞줄에 서 있던 젊은 남자가 내 쪽을 향해 큰 소리로 말했다.
 "아주머니 먼저 치료하세요!"
 남자가 병원바닥에 떨어진 핏자국을 검지로 가리키자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내 쪽으로 몰렸다. 아뿔싸, 그새 피는 화장지를 다 적시고 바닥에다 붉은 쉼표를 찍고 있는 것이 아닌가. 발이 자동으로 의사 앞으로 가졌다. 의사는 서둘러 부분마취를 하고난 뒤 바로 봉합 수술에 들어간다고 했다.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 했다. 침대에 누워 손을 의사에게 맡기고 있으니 조금은 편안했다. 잠시 눈을 감는 순간 뜬금없이 맑은 눈물이 주르르 흘렀다.

 칠칠치 못한 자신이 미웠다. 이런 나를 위해 선뜻 배려를 해준 젊은 남자가 고마웠다. 황금휴일을 반납하고 사랑으로 치료해주는 의사와 간호사가 고마웠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라는 말이 저절로 나왔다. '누구나 이 정도 실수는 하고 삽니다'라는 말을 건네는 의사, '마음이 여리시군요'라고 사랑으로 위안을 해오는 간호사가 그렇게 고마운 적은 처음이었다. 치료를 마치고 나오면서 기다리는 뒷사람들에게 고마움의 허리를 숙였다. 말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마음의 표시였다.

 저만치 빈 의자로 가 앉아 병원 안을 찬찬히 둘러보았다. 그 안에 있는 사람 모두가 천사로 보였다. 이런저런 환자의 하소연을 다 들어주면서도 웃음을 잃지 않는 창구직원, 가족처럼 다정하게 대하는 의사와 간호사, 배려를 아끼지 않는 이웃들이다. 이런 이웃 덕에 나는 본래의 안정을 찾았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주변사람의 인간적인 따뜻함에서 받은 감동으로 바라본 세상은 모두가 천사의 얼굴이었다. '정말 좋은 이웃이 많구나, 천사란 그리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구나.'라는 사실을 새삼 느꼈다.

 '아, 얼마나 다행한가. 나는 또 얼마나 축복받은 인간인가.' 하는 희열이 걷잡을 수 없는 감동으로 가슴에 파도처럼 밀려왔다. 병원을 나와 집으로 오는 길 건널목 앞 신호등, 교통을 정리하기 위해서 있는 교통순경들도 모두 고마워라. 세상은 천사들이 널려 있다. 아, 고마워라. 저 지나가는 사람들 모두가 고마워라…. 속으로 '고맙습니다!'를 연방 외쳤다.

 천사는 멀리 있지 않다. 마음을 열어보니 고마운 이들의 손길은 어디든지 있다. 천사는 우리 주변에, 바로 평범한 이웃의 모습으로 있다. 지금까지는 천사를 날개가 달린 성스러운 모습으로만 떠올렸다. 그러나 실제의 천사는 그런 모습이 아니었다. 천사는 극히 평범한 사람의 모습이었다. 천사는 우리 주변, 바로 우리 이웃의 얼굴에 있었다. 요즈음 가는 곳마다 천사를 자주 만난다. 눈뜬 심 봉사처럼 만나는 사람마다 반갑고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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