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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바위 남쪽면에 보이는 삼존불. 다른 면과 달리 사각으로 파낸 감실에 조성한 독특함으로 눈길을 끈다. 이 삼존불을 주불로 모신 사찰이 있었다고 추정되나 그것이 신인사인지는 알 수 없다.
# 명랑의 비법을 구하다
부처바위에 간다는 것은 명랑법사의 비법을 만나러 가는 것이다. 산은 진초록의 향연으로 가득하다. 잠시 고목이 늘어선 계곡아래 융단처럼 깔린 이끼에 눈길을 빼앗긴다. 햇살이 부챗살로 내리는 계곡위로 멀리 새한마리 난다. 부처바위를 찾아가는 길은 이렇게 호젓하고 고요해서 좋다.
 부처님 오신 날 불 밝혔던 연등은 그저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염화시중의 미소로 조용하다. 마을 입구서 300여m 길을 따르면 작은 다리가 나온다. 계곡 너머가 부처바위다.
   
부처바위로 가는 길 내내 오른쪽으로 따라붙는 작은 계곡. 오래된 고목과 어린 단풍나무가 만들어내는 가을의 찬란한 색감이 기대된다.

  명랑은 한때 신라 밀교를 이끌던 대승으로서 나라를 위기에서 구한 인물이었다. 문무왕 때 당나라는 웅진도독부를 신라가 공격한다는 핑계로 50만 대군으로 공격하려 했다. 이때 당에 있던 의상이 이 사실을 왕에게 알리자, 왕은 명랑법사에게 적을 막을 수 있는 방법을 구했다.
 명랑은 낭산 아래 신유림에 사천왕사를 짓고 부처의 힘을 빌리도록 건의했다. 그러나 절을 지을 시간이 부족했다. 명랑은 임시로 비단과 풀로 절의 모습을 갖춘 뒤 12명의 스님들과 더불어 문두루비법을 펼쳤다.
 문두루비법은 불단을 설치하고 다라니 등을 외워 부처의 힘으로 국가적 재난을 물리치는 신라 밀교의 한 비법이었다. 그러자 거센 바람과 커다란 파도가 크게 일어나 당군의 배가 모두 가라앉았다고 한다. 그 후 5년 만에 절을 완성하고 사천왕사라고 했다.(삼국유사)
 
   
서쪽면의 불상들.

 부처바위는 명랑이 그 밀교의 본산으로서 터를 잡은 신인사에 새긴 사면불이다. 공식적으로 경주 남산 탑곡 마애불상군(慶州 南山 塔谷 磨崖佛像群·보물 제 201호) 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일제 강점기 일본학자 오오사카가 이 곳에서 신인사(神印寺)라 명문이 새겨진 기와조각을 발견해 문헌 속에서만 존재하던 절집이 실체를 드러냈지만 신인사는 오랫동안 버려졌고 남아있는 것이 없다.
 부처바위 바로 아래 1920년 옥룡암이 들어선 후 수차례 불사를 거쳐 현재는 불무사로 불린다. 1942년 폐질환을 앓던 시인 이육사가 이곳에 잠시 요양하면서 '옥룡암에서 신석초에게'라는 문구로 시작하는 시조 2편을 남기기도 했다.
 분주한 기원의 야단법석이 물러간 절집마당은 개한마리가 다 차지하고 누웠다. 낯선 이의 방문을 개의치 않는 듯 힐끔 한번 보고 다시 잠을 청한다. 마당에 비스듬히 선 늙은 소나무만 명랑의 전설을 힘겨운 듯 떠받치고 있다.

# 바위에 새긴 30여개의 기원

   
북쪽면에 새겨진 9층목탑.

대웅전 왼쪽으로 돌아서면 웅장한 바위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경사진 땅에 높이 약 9m, 둘레 약 30m의 사각형으로 우뚝 섰다. 부처바위다. 사면에 새긴 부처와 탑, 비천상 등이 30여개다.
 시선을 먼저 잡는 것은 북쪽면의 목탑이다. 9층과 7층이 나란히 서 있고, 탑 상륜부 사이 연꽃대좌 위에 앉아 있는 불상이 있다. 황룡사 9층 목탑의 형상이 이러하지 않았을까. 동면에는 불상과 보살, 승려, 그리고 비천상(飛天像)을 표현해 놓았다.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를 갖추었으며 표정이 각기 달라 이채롭다. 서쪽 면에는 석가가 그 아래 앉아 도를 깨쳤다는 나무인 보리수 2그루와 여래상이 있다.
 

 바위 남면은 산등성이와 연결되어 한 단 높은 대지를 이룬다. 다른 면의 조각들이 올려다보는 형태였다면 남면에는 마주보는 형태다. 갈라진 바위틈을 기준으로 오른쪽에 사각형모양으로 파내 감실을 만들고 그 안에 삼존불 좌상을 돋을새김으로 조성했다. 바위면의 색깔이 연한 살굿빛으로 은은하다. 근엄함의 본존불과 어깨를 살짝 내민 협시불의 앙증맞음이 보여주는 생동감이 이채롭다. 그 앞에 홀로 보살형 석불이 서있다. 보살상의 얼굴은 오랜 비바람에 알아보기 힘들지만, 딛고 선 두발은 당당하고 굳건하다.  
 남쪽면은 목조건물의 터와 석등 등으로 미루어 이 삼존불상을 주불로 모신 사찰이 있지 않았을까 추정되지만 신인사인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거대한 바위에 여러 상을 자유분방하게 한 자리에 새긴 유일한 사방불만으로도 충분히 문화적 가치를 지닌다.
 

   
계곡을 건너 왼쪽으로 돌아가면 부처바위가 나온다. 부처님 오신 날의 소란한 기원이 물러간 절집에 한낮의 고요함이 가득하다.

# 섬세한 결 고스란히 간직한
남쪽 소나무 아래 삼층석탑이 환하게 섰다. 주변에 흩어진 석재들을 모아 1977년에 복원 한 것으로 신라말기의 형식을 따랐다. 높이 4.5m로, 각 층의 옥개석마다 3단의 층급받침이 있다.
 천 년 전 석공의 망치질이 그대로 느껴지는 듯 거친 듯 쪼아낸 자국이 선명하다. 기울어진 소나무와 묘한 조화가 어울리는 그림이다. 그 뒤로 신록이 싱그럽다.  탑 앞에 서면 부처바위 삼존불과 불무사가 눈 아래 펼쳐진다. 솔바람, 댓바람소리가 가끔 숲의 정적을 살짝 흔들고 지나간다. 명랑이 만들어낸 하룻밤의 비법이든, 석공이 오래 새긴 간절한 기원이든 천년의 시간을 건너온 만다라는 여전히 장엄하다. 부처바위에 가면 오랫동안 서성이게 된다. 마음에 새겨지는 풍경이 적지 않다. 글·사진=김정규기자 kj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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