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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세월호의 참사로 6월을 눈물로 보내고 머지않아 민족최대의 비극인 6·25를 맞는다.

 우리는 6·25를 맞을 때 마다 주먹을 쥐고 결의를 다지게 되지만 막상 우리고장 신불산을 중심으로한 영남 알프스 일대에서 벌어진 7년 동안의 전쟁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그다지 많지 않은 것 같다. 좌(左)와 우(右)의 이념투쟁으로 시작된 전쟁이었어도 정규군(軍)과 항공기가 동원되어야 할만큼 치열했던 싸움이 6·25를 전후해 7년동안 이곳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좌익과 우익이란 말은 프랑스혁명 이후인 1792년 프랑스 국민의회에서 급진개혁파인 자코뱅당이 의장석에서 보아 의장의 왼쪽에 자리를 잡고 보수파인 지롱드당이 의장의 오른쪽에 자리를 잡고 앉은 데서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우리민족만이 이렇게 우연히 생겨나게된 말을 두고 편이 갈려 싸우며 끔찍한 전쟁을 치루면서 지금까지도 동족이 그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불행한 나라가 된것이다.

 신불산에 이런 좌익이 발을 딛게 된것은 지리산에 거점을 둔 남한 빨치산의 총수 이현상의 휘하에 있었던 소위 인민유격대의 주요인물들이 거의 이곳을 거쳐 감으로써 본격화되었지만 사실은 그 이전의 남로당에 물든 무리들에 의해서였다. 그들은 울산의 전지역에 흩어져 암약하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갖은 만행을 저질렀던 것이다.

 나는 남부군(南部軍)의 저자 이태(李泰)로 부터 생생한 증언을 들은적이 있다. 그는 중앙통신의 전주(全州)주재 기자였다가 6·25로 인해 공산당원이 되어 곧 지리산 인민유격대의 기록요원으로 빨치산이 되었다. 뒤에는 울산출신의 정해영 국회의원의 비서관으로 있다가 비례대표로 국회의원이 되었던 참으로 보기드문 경력의 소유자였지만 본명은 이태가 아닌 이우태(李愚泰)로 충청북도 제천 출신이었다.

 역사에 대해 해박한 지식으로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던 그와는 정의원을 보필하게된 인연으로 1년이 조금 넘도록 같은 사무실에서 지낸 사이여서 퍽 가깝게 지낼 수 있었다. 그는 6·25 당시 서울의 함락이 쉽게 이루어지고 그 여세를 몰아가면 승리를 가져올 수 있다는 망상에 도취되어 독전차 전선에 왔던 김일성이 신불산을 부산점령의 교두보로 삼을 것과 울주군 언양을 중심으로 울산의 일부를 인민특구로 확보하라는 지시를 특별명령으로 하게되었다고 말했다. 이에 따라 인민유격대 지리산 병단의 두령인 이현상은 병력과 주요무기를 집중 지원하고 악명높은 남도부(南道富)인민군중장 부대를 창설해 신불산에 주둔케 했다는 것이었다. 이태는 이렇게 중요시하는 신불산에서 이현상과 남도부 그리고 제주 4·3폭동의 주모자 김달삼이 주요회의를 갖게 될 때 지리산에서 도보로 신불산까지 왔으나 신불산에서 회의를 가질 분위기가 아니여서 운문산에서 회의를 하게 되었다고했다.

 신불산에는 남침으로 낙동강까지 내려왔던 인민군의 잔류병과 국군으로 여순반란사건에 가담했던 좌익계 병사들, 또 초기 야산대로 부터 정식 빨치산이 되기까지 산사람이었던 골수빨갱이들로 구성된 최정예의 인민유격대가 점령하고 있었다. 이들을 지휘하면서 언양을 인민특구로 만들겠다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남도부가 대구에 나갔다가 군경의 검문으로 체포됨으로써 지루했던 7년 동안의 신불산 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그런데 이 공비들을 몰아내는데 목숨을 내던지면서 밤낮없이 공비들과 싸우고 우리들의 안식처인 영남알프스에 평화를 되찾아준 단체가 있다. 바로 신불산 참전 유공자회다. 용감했던 이 고장의 장정들은 스무살 남짓 할때부터 자위대로 의용경찰로 죽창을 들고 공비토벌에 참가하여 신불산에 평화를 찾을 때까지 군번없이 싸웠던 장한 용사들이었다. 남도부의 동향을 미리 알아냄으로서 그의 체포를 용이하게 했고 또 그의 잔당을 모두 괴멸시키면서 자유대한에 마지막 빨치산의 종적을 사라지게한 위대한 용사들이었다. 다시 한 번 별로 기억에 새겨두지 못했던 이들의 공을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맞아 되새겨야 할 것이다. 며칠전 신불산참전 유공자회 박병곤 회장과 몇몇 회원을 찾아가 만났다. 그분들은 아직도 팔순을 넘기고도 정정한 노병이었다.

 그러나 이분들도 머지않아 사라져갈 것이다. 작년에 펴냈던 신불산전사도 이분들이 사라지기전에 더 충실하게 보강 편찬해 후세에 길이 남기면서 고장의 전통과 정체성을 살리는 교훈으로 삼았으면 어떨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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