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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의 과거와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위한 열쇠를 찾아 울산의 뿌리를 제대로 알리고자 울산신문은 U-매거진 '울산지리지-걸어서 울산속으로'를 선보인다. 울산시청 홍보관에 울산의 도시 전경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위성사진을 바탕으로 1,500분의 1 축적으로 제작된 도시모형이 웅장하게 펼쳐져 있다. 유은경기자 usyek@
1. 프롤로그
나라에 사(史)가 있다면 고을엔 지(志)가 있다. 이것이 우리의 문화전통이다. 지리지는 지역의 역사와 지리, 인물, 풍속 등을 기록한 책이다. 울산의 현재는 산업도시지만 과거는 문화와 역사가 뿌리를 내린 고장이었다. 울산신문은 앞으로 금요일자 U-매거진을 통해 '걸어서 울산 속'으로 들어가 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울산의 과거와 현재를 진단하고 미래를 위한 열쇠를 찾는 것은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울산의 뿌리를 제대로 알리고자 한다. 이번 기획을 통해 울산신문은 울산의 구석구석을 걸어서 답사하는 기행취재를 통해 그동안 간과했던 울산의 인문학적 지리지를 다시 만들어 보고자 한다. 특히 사라져가는 마을의 역사와 문화, 풍습, 인물, 지리 및 과거 현재 미래를 비교, 분석하고 그동안 마을의 공개되지 않은 사진을 발굴해 사료적 가치를 제고하는 자리를 마련할 예정이다.


석기시대부터 육로·해로로 들어와 정착생활
지역곳곳 각종 유적·유물 발굴 생활터전 증명
산업수도 인식 굳힌 현재 역사 흔적 뒤안길로
수천년 강 따라 흐른 이야기 체계적 접근 필요


▲ 남산에서 바라본 울산의 옛모습이다. 멀리 시가지 일대가 한적한 도시분위기와 무성한 대밭이 조화를 이루고 있다. 길가의 초가가 서정적인 당시의 생활상을 연상케 한다.
# 울산, 새로운 출발점에 서다
필자는 울산지리지를 준비하며 두가지 기준을 잡았다. 그 첫째가 현재 보이는 것만으로 판단하지 않겠다는 점이다. 그리고 두 번째가 사람 중심의 인문지리지를 만들어 보자는 생각이었다. 그 첫 발걸음을 울산광역시청으로 옮겼다. 시청 신청사 1층에는 웅장하게 펼쳐진 울산의 모습이 미니어처로 펼쳐져 있다. 사진으로 보이는 울산광역시 모습은 홍보관에 설치된 울산의 미니어처다. 인공위성 사진을 바탕으로 1/1,500의 축적으로 만든 이 미니어처는 오늘의 울산을 가장 잘 보여주는 생생한 현장이다.


 한반도의 동남쪽에 위치한 울산은 예로부터 사람이 살기 좋은 터전이 되어 우리의 선인들이 아득한 석기시대부터 육로 또는 해로로 이곳에 들어와 정착사회를 이루어 살았던 곳이다.
 서생면 신암리, 병영동 병영성지, 장현동 황방산의 신석기 유적이 있고 석검이 출토된 화봉동과 지석묘가 있는 언양면 서부리의 청동기 유적이 있다. 이 밖에 북구 중산동, 온산면 산암리, 언양읍 동부리, 삼동면 둔기리, 온양면 삼광리, 상북면 덕현리, 동구 일산동, 중구 다운동, 삼남면 방기리 등지에서 각종 유적과 유물이 관계 연구기관과 대학박물관에 의해 발굴되었다.
 또한 사연댐 상류에 위치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암각화에는 고래·거북·사슴·멧돼지 등의 각종 동물그림이 있고, 두동면 천전리의 각석에는 원·삼각형·마름모 등의 각종 기하학적 무늬들이 있어 울산지방이 고대 인간사회의 유력한 생활터전이었음을 증명함과 동시에 당시 사람들의 의식세계를 보여 준다.


▲ 고래 해체작업이 시작됐다. 장대칼로 등을 자르자 검붉은 피가 솟아 오른다. 마치 고목을 눕혀놓은 느낌이다. 고래인지 산인지 놀라울 뿐이다. 우측 한켠에서는 작업을 돕기 위해 장대칼의 날을 세우고 있다.
 울산은 고대 우시산국(于尸山國)과 굴아벌촌(屈阿火村) 혹은 굴아화촌이라는 소국가를 중심으로 사람들이 모여 문화를 일구고 역사를 만들어 온 곳이다. 기록으로는 신라가 파사왕 때 이곳을 취해 굴아화현(屈阿火縣)을 두고, 남쪽에는 생서랑군(生西良郡), 동쪽에는 동진현(東津縣), 언양지방에는 거지화현(居知火縣)을 두었으며, 757년(경덕왕 16)에 하곡현(河曲縣, 일명 河西縣)으로 이름을 고치고 월성군(月城郡) 외동읍(外東邑) 모화(毛火) 지방에 있던 임관군(臨關郡)의 영현으로 삼았다고 전해진다.
 지금은 산업수도로 변한 울산의 역사는 그만큼 깊다. 일반적으로 대한민국 사람들은 울산을 여전히 '굴뚝 도시'로 인식한다. 하지만 울산은 한반도 인류의 시원이 깃든 땅이다. 한반도의 동남쪽에 위치한 울산은 예로부터 사람이 살기 좋은 터전이 되어 우리의 선인들이 아득한 원시시대부터 육로나 해로를 따라 들어와 정착사회를 이루어 살았던 곳이다. 거짓말처럼 들리는 이 이야기는 울산박물관에 가면 확인할 수 있다. 서생면 신암리 유적이나, 장현동 황방산의 신석기 유적이 있고 석검이 출토된 화봉동과 지석묘가 있는 언양면 서부리의 청동기 유적이 있다. 어디 그 뿐인가. 한반도 선사문화 일번지인 대곡천 일대의 암각화는 울산이 고대 한반도 정착민의 영험한 영역이었음을 그대로 보여준다.


▲ 울산특정공업지구 설정하는 날 박정희 장군 일행이 도열해 있는 학생들에게 환영의 답례를 하면서 기공식장에 입장하고 있다.
 울산은 천혜의 땅이다. 그 천혜의 땅에서 일궈낸 문화의 힘이 고대국가와 신라, 고려와 조선을 지나 오늘에 연결돼 있다. 그 오랜 역사의 끝자락이 산업수도 울산이지만 오래된 과거는 울산을 그렇게 설명하지 않는다. 이미 7,000년 전 이 땅에서는 해양문화와 북방문화가 만나 새로운 문화를 만들기 시작했고 천년 전에는 통일신라의 가장 중요한 국제무역항이었다. 그 뿐인가. 고려 이후 수군의 거점지역으로 해군항의 역할을 해온 것이 울산이고 600년 전 울산의 이름을 부여받고 경상좌도의 중심으로 한반도 동남쪽의 요새가 됐던 곳이 울산이다.
 그런 울산이 근대화 50년 역사로 평가되는 일은 불행하다. 50년 역사가 비록 대한민국 근대화의 상징이자 산업수도를 이끈 영광의 시간이었다 해도 그것이 울산의 전부는 아니다. 반세기 전 울산에 모여든 대부분의 시민이 새로운 울산의 주인이 된 튼튼한 내공을 가진 도시다. 반구대암각화로부터 현대자동차와 중공업에 이르는 수천년 세월이 강을 따라 흐르는 도시가 울산이다. 바로 그 지점에서 울산을 다시 이야기해야한다. 이제 울산의 역사와 문화는 현대화 이전의 울산, 즉 역사성을 더듬어 그 본래의 모습을 찾아가는 작업을 출발점으로 삼아 하나씩 체계화 할 필요가 있다.
 

인류 최초 포경의 역사 품은 반구대암각화
바다·육상생물 새겨놓은 진귀한 문화유산
달천 철장 고대 철 제련 흔적 공업도시 근간
잊혀져간 고대사 바로알고 뿌리 바로잡아야



▲ 반구대 암각화를 찾은 가족 나들이객들이 암각화를 보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다.
# 반구대암각화와 울산
한반도에서 우리의 조상들이 처음 고래를 사냥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인류학적으로나 문화사적으로 매우 의미 있는 사실이다. 보존 논란의 중심이 된 반구대암각화가 세상에 알려지기 전까지 인류의 고래잡이는 노르웨이에서 시작됐다고 알려져 있다.
알타지방에 분포된 암각화가 그 증좌였다. 하지만 반구대암각화가 발견되고 학자들의 연구성과가 하나씩 나타나면서 이 정설은 흔들렸다. 지난 2004년 영국 BBC 인터넷판이 "인류 최초의 포경은 한반도에서 시작됐고, 그 증거는 반구대 암각화"라고 보도했다. 놀라운 가설이었다. 생뚱맞은 눈으로 BBC 보도를 접한 세계의 고고학계는 반구대암각화를 주목했다.


 1985년 알타의 암각화군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한 노르웨이는 화들짝 놀랐다. 설마 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반구대암각화의 바위그림들은 6,000년 넘게 품고 있던 다양한 고래를 세상에 내놓았다. 세계적인 석학으로 포경사의 권위자인 프랑스 파리국립자연사박물관 호비노 교수가 이 가설에 힘을 실었다. 그의 저서 '포경의 역사' 첫 장에는 알타의 고래그림이 아닌 반구대암각화의 고래가 유영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는 "세계 포경역사의 시발점을 말해주는 것은 반구대암각화다"고 밝혔다. 반구대암각화가 더욱 놀라운 것은 18세기, 스웨덴 생물분류학의 창시자 린네가 분류한 고래의 단서가 모두 들어 있다는 점이다.


▲ 진주 촉석루, 밀양 영남루와 함께 조선시대 영남지역 3대 누각이었던 울산 '태화루'가 400여 년만에 시민 품으로 돌아왔다.
 사정이 이쯤되자 고래잡이의 원조라 주장하던 노르웨이가 멋쩍어졌다. 3만여 점이 넘는 방대한 바위 그림을 자랑하는 노르웨이 알타 암각화군은 선사문화의 보고다. 고래그림이 세상에 처음 알려진 것도 알타이지만 해양동물과 육상동물의 그림이 같이 그려져 있는 암각화는 알타 이외에는 없었다. 그런데 반구대암각화가 보물지도처럼 세상에 드러났다. 육상동물은 물론 무수한 고래그림이 사람과 함께 바위에 새겨져 있었다. 어디 그 뿐인가. 사냥의 과정과 고래의 생태까지, 반구대암각화는 거의 고래백과사전 급으로 구성된 고대 인류 문화의 타임캡슐이었다. 급이 다른 암각화를 확인한 노르웨이 알타 암각화 박물관은 이제 더 이상 스스로 고래잡이의 원조라 주장하지 않는다.
 이제는 보편화된 이야기지만 반구대암각화는 바다와 육상 생물을 모두 새겨 놓은 진귀한 문화유산일 뿐만 아니라 우리민족의 유래를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다. 반구대암각화의 학술적 가치는 세계적인 석학들이나 인류학자들이 인정하는 부분이다. 세계적으로 암각화를 연구하는 이들은 그림으로만 보던 반구대 암각화를 하나같이 눈앞에 놓고 그 숨결을 느껴보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동안 문화재 당국은 자연상태의 훼손은 어떤 것도 안된다는 논리로 형상변경이나 발굴조사를 외면해 왔다.


▲ 울산공단야경. 울산의 역사와 문화는 현대화 이전의 울산, 즉 역사성을 더듬어 그 본래의 모습을 찾아가는 작업을 출발점으로 삼아 하나씩 체계화 할 필요가 있다.
 7,000년 전의 한반도는 지금과 다른 환경을 가졌을 가능성이 크다. 반구대암각화가 위치한 대곡리 인근까지 해안선이 올라와 있었을 것이라는 추론과 주변의 토기 제작 흔적을 미루어 볼 때, 집단적인 선사주거지역이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개운포 인근 세죽마을에서 7,000년 전 선사인의 생활도구들이 패총과 함께 발견된 것도 잊지 말아야 한다. 세죽마을과 대곡리가 해안선으로 연결됐고, 이들이 7,000년 전 이 땅의 주인이었다면 그 흔적은 반구대암각화나 패총 말고도 더 많은 것을 남겼을 가능성이 크다는 이야기다. 우리 선조들의 한무리는 시베리아 바이칼 지역에서 출발했고, 또다른 무리는 폴리네시안 계열의 남방 해양 쪽에서 유입됐다는 이야기는 가설의 수준을 넘어선 사실이다. 많은 학자들이 시베리아에서 샤먼(무당)에 대한 많은 자료를 조사하고 우리 민족과의 유사성을 찾기 위한 연구를 하고 있는 만큼 남방지역의 문화적 유전인자를 찾아가는 작업도 병행되어야 한다. 시베리아 시스키스키 암각화에서 발견되는 육상동물의 모습과 사냥술이 반구대암각화의 원형이라면 고래잡이의 원형은 바다 쪽 어느 지점에서 찾아낼 수 있다는 가설이 가능하다. 바로 반구대암각화가 해양문화와 북방문화의 절묘한 교차점이기에 그렇다.
 그로부터 7,000년이 흘렀다. 1962년, 박정희 군사정권이 울산을 특정공업지구로 지정했다. 울산이 공업입국과 조국근대화의 선봉장이 된 셈이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지금, 울산은 대한민국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담고 있는 롤모델이 됐다. 달천 철장을 중심으로 한 고대 철 제련술과 철제 무기의 흔적은 울산이 오늘의 공업도시, 산업수도라는 바탕이 된다. 우리의 경우 고대사 부분에서 많은 사료들이 유실됐고 현존하는 사료들이 극히 부족한 탓에 울산의 과거사는 미스터리식 고대사로 치부되고 있다. 이는 대한민국 선사문화의 출발지가 울산이고 그 바탕위에 신라가 다문화 다민족의 글로벌 왕국이 됐다는 인식의 전환에 장애물이 되고 있다. 문제는 일본의 도시계획 전문가 이케다 사다오에 의한 울산 공업센터 구상이 울산의 오늘을 있게 한 근본이 아니라 석탈해로 시작되는 북방의 철기 문화가 바로 울산에서 시작됐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이를 근거로 울산이 대한민국의 미래를 이끌 수 있다는 사실부터 제대로 읽어야 오늘의 역사와 내일의 울산을 그려낼 수 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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