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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가

지난 여름, 한 친구를 만났다. 우리는 오래전 경주에서 같은 여고를 졸업하고 헤어졌다가, 결혼 이후 우연히 울산 방어진에서 다시 만났다. 당시 나는 가게를 하고 있었고, 그는 손님으로 왔다. 그때 처음으로 친구가 지척에서 과일가게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나는 보상심리가 발동했던지 그날 이후 수시로 친구네를 들락거렸다. 더 기막힌 사실 하나는 각각의 신랑들이 어릴 때 '황룡'이란 동네에서 선후배로 컸다는 것을 알고부터 더 가까워졌다.

 가족이나 진배없이 지냈다. 타지에서 유일하게 마음 비빌 든든한 둔덕, 가슴을 데워주는 밥, 고충을 녹여주는 각설탕 같은 존재로 지냈다. 하지만 그런 행운은 오래가지 못했다. 장맛비가 오다 말다 게으름을 피우던 날 친구가 느닷없이 이별을 말했다. 대구 쪽에 사는 친척이 마침 좋은 일자리를 두고 신랑을 급하게 찾는다는 거였다. 아무리 사람 사는 일이 회자정리가 인지상정이라지만, 당황스러웠다. 친구 통보에 한방에 속이 둔덕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결국 친구는 일사천리로 가게를 접어 떠났고 나는 '부디 행복해야 한다'며 손 흔들며 속으로는 울고 있었다.

 그렇게 헤어진 이후로 30년 만이다. 그동안 수소문을 했지만, 매번 헛수고였다. 요즘처럼 SNS가 안 되던 때라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매정한 친구가 서운했지만, 나 또한 사는 일이 그간 콩죽을 끓이듯 바쁜 신세라 잊고 지낼 때가 더 많았다. 세월은 더 늙기 전에 인연의 끈을 이어주고 싶었던 걸까. 지난 봄,  동창회를 갔던 남편이 기별을 물고 왔다. 이태 전, 친구네가 고향으로 귀농해 농사와 동네 이장 일에 바빠 동창회에 불참이라는 말에 귀가 번쩍 뜨였다. 그간 유목민처럼 타지를 돌며 한 사업이 결국 빈손으로 고향땅을 밟게 한 모양이었다.

 연락을 하고 친구를 찾아갔다. 보문단지를 벗어나 감포로 이어지는 추령고개를 달려가다 왼쪽 '황룡마을'로 접어들었다. 칠월의 숲은 푸른 물을 뚝뚝 떨구며 낯선 이방인을 맞았다. 잔가지조차 바람을 아끼는 삼복더위에 매미는 미루나무를 전세 낸 듯 노래 삼매경에 빠져있다. 골짝 논을 타고 철철 흘러내리는 물은 스스로를 산산조각 내어 주변과 조화를 이루었으니 '산속음악회'가 되었다. 내가 다가가자 잠시 소리를 낮추다가 이내 연주를 이어갔다.

 드문드문 낡은 농가가 오수에 들었다. 그중 짐작이 가는 대문 옆을 비켜서서 한참을 어정거렸다. 망초꽃 위를 날던 잠자리들이 낯선 내가 수상쩍었던지 저희끼리 기웃대며 망을 보았다. '네놈들이 어찌 나를 알리' 싶어 씁쓸한 표정을 지어 보이는데 저만치 밀짚모자에 호미를 든 친구가 양팔을 흔들며 다가왔다. 가슴을 끌어당겨 포옹한 뒤, 오랜만에 친구와 마주앉았다.  덧없는 세월은 눈과 입가에 주름으로 기록하는가. 반백의 머릿결이 땀에 젖었다. 웃을 때 드러나는 하얀 치아에 느릿한 말투며 생머리를 뒤로 넘겨 고무줄로 질끈 동여맨 모양새는 변함이 없다.

 "옛 모습 그대로네, 곱게 늙었네"라고 말하는 내게 친구는 손사래를 쳤다. 20대 청춘이 육망에 만났으니 머릿속은 하고 싶은 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입 밖으로 먼저 나오려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자식은 몇이며 결혼은 시켰는지, 손자는 보았는지, 건강은 괜찮은지, 그보다 더 '지금 행복한지'가 궁금했지만, 말을 아꼈다.

 친구는 이태 전 이곳에 왔다했다. 오래전 시어른들이 쓰던 빈집을 수리해 솥을 걸었다. 문중의 묵정밭을 새로 일구고 집 앞 논 뜰만 해도 일손이 달린단다. 논농사 말고도 특용작물 고사리와 딸기농사는 손이 많이 가고, 그 대신 수입이 짭짤하고 공급이 달릴 지경이란다. 땅에 땀을 흘리는 일이 제일 정직해서 늦게 찾은 일이지만, 그 재미가 인생 최고의 행복을 안겨준단다. 또 부부가 이장 일을 맡아 봉사 기회까지 얻었으니 금상첨화라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이제야, 이런 게 사람 사는 거구나 싶고 어쩌면 '지금이 내 인생 황금기'가 된 듯 하단다. 마주하는 내내 함박꽃으로 피어나는 친구 옆에서 나도 덩달아 행복했다. 일회용인 인생, 우리는 이미 그 절반 이상을 써 버린 사람들이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생각에 젖어 '나는 행복한가'를 묻고 있었다. 이는 비단 친구나 나에게 해당하는 질문만은 아닐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에게 던지는 질문이다. 이 질문을 자신에게 묻고 답할 때는 순수 절규고, 고백이 될 것이다.

 사는 일이 두루마리 화장지처럼 술술 풀리는 이가 몇이나 될까. 평생 죽을 힘을 다해 얻은 행복이 상실의 멍에로 남겨진 채 늙는 것이 우리네 인생이다. 그래서 요즈음 한 여가수는 '우리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익어가는 것'이라고 노래하지 않던가. 지금쯤 황룡뜰에는 초가을 햇살에 행복이 누렇게 익어갈 것이다. 올해는 풍년이 들었다했으니 친구 부부가 밀짚모자를 눌러쓰고 가을 햇살에 땀을 훔쳐도 입이 귀에 걸리고 마음은 구름 위를 걸을 것이다. 추석을 지나면 본격적인 추수철이니 일손을 거들어야 한다며 남편이 더 난리다. 올 가을 우리 부부는 행복충전을 위해 '황룡' 걸음이 잦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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