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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이사

우공이산. 너무나 자주 사용하는 사자성어다. 어리석은 노인이 산을 옮겨 놓는다는 말이 식상한 시대, 물고 늘어지는 근성이 사라진 오늘에 던지는 과거의 따귀같은 말일지도 모른다. 중국 고전 열자(列子) 탕문편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사방 둘레가 700리나 되고, 높이가 만 길이나 되는 산을 옮긴 사내의 이야기다. 북산의 우공(愚公)은 아흔이 가까운 나이였지만 의지 하나는 대단했다. 산 북쪽이 길을 막고 있어 드나들 때마다 멀리 돌아서 다녀야만 했던 노인은 가족과 상의해 산을 옮기기로 했다.

   가족과 함께한 이 대공사는 마을사람까지 합세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이 광경을 본 이웃 노인은 우공을 향해 "이 사람아, 어쩌면 그리도 어리석은가. 다 죽어 가는 자네 힘으로는 풀 한 포기 제대로 뜯지 못할텐데 그 흙과 돌을 어떻게 할 작정인가?"며 비웃었다. 그러자 우공은 그를 향해 이렇게 말했다. "자네의 좁은 소견은 어린아이 지혜만도 못하지 않은가. 내가 죽더라도 자식이 있지 않은가. 그 자식에 손자가 또 생기고 그 손자에 또 자식이 생기지 않겠는가. 이렇게 사람은 자자손손 대를 이어 한이 없지만 산은 불어나는 일이 없지 않은가. 그러니 언젠가는 평평해질 날이 있지 않겠나"

 산을 옮겼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딱 그 말 한마디다. 끈기과 근성, 개천에서 용 나온다는 전설같은 이야기는 정말 전설이 된 시대다. 흙수저와 금수저에 이제는 다이아수저론까지 튀어 나오는 판에 우공의 어리석은 산 허물기를 이야기하면 딱할 수도 있다. 그런데 일을 냈다. 케이블 티비 이야기다. '응답하라 1988'이 끝나자 지상파 드라마의 견고한 아성이 무너졌다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다. 물론 반박할 수 있다. 거대 자본의 뒷배를 가진 케이블 시장에서 콘텐츠는 곧바로 막강한 투자의 자식이 아니냐고 목청을 높일 수 있다. 자본의 뒷배가 전제된 싸움을 이야기 하자는 게 아니라 핵심은 드라마 시장의 기득권 싸움에 당당히 맞선 케이블의 역전드라마다.

 우리는 최근 이야기의 힘에 대해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이야기의 힘이 문화의 뼈대가 되는 것처럼 떠들기도 했고 이야기를 무슨 금맥이나 되는 것처럼 발굴하고 파헤치고 찾아다녔다. 때로는 안드로메다 어느 왕국의 왕자가 지구 소녀를 구하기도 하고 100일 동안 마늘만 먹던 곰이 사람으로 환생해 강건너 산넘어 바다로 나가 거북 등을 타고 대양을 가로지르며 나라를 창업하기도 했다. 신화부터 SF까지 실로 방대한 이야기 그물이 몇해 사이에 촘촘하게 만들어졌다. 창조가 나라를 구한다고 이야기를 창조하는 나라가 됐지만 지어낸 이야기는 감동이 없어 인쇄물이거나 영상물이거나 아니면 텍스트 파일로 거대한 데이터 베이스에 잠자고 있을 뿐이다.

 이야기를 살아 움직이게 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한 케이블 방송이 응답하라 시리즈를 만들기 시작할 무렵, 우리는 심각한 '단절사회'로 빠져들고 있었다. 학교는 이미 사제간의 소통이 교감하는 교육의 장소가 아니라 잘먹고 잘사는 방법을 위한 통과의례였고 어머니 같은 교사 아버지 같은 스승은 호랑이 담배피우던 시절의 콧노래가 됐다. 맞벌이 세대가 늘고 육아를 기피하는 젊은층이 기하급수로 많아지면서 가정은 이미 우리사회를 버티게 하는 탄탄한 버팀목이기보다 치열한 삶의 전장에서 잠시 벗어나 옷 갈아 입고 잠 자는 휴게 공간이 됐다. 학교와 가정의 붕괴는 단절의 출발이 아니라 종착지다.

   소통의 출발지가 붕괴된 사회에서 정치의 포용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이러니다. 더 자신들을 위한 사회가 됐고 더 자기편을 위한 이분법이 견고해질 수밖에 없는 사회였다. 그래서 우리는 소통을 이야기하고 화합과 조화를 이야기했지만 결핍된 것들을 알약 한 알로 대체하는 습관은 버리지 못했다. 주사 한방이거나 알약 하나쯤으로 보충할 결핍이 아닌데도 우리는 소통을 주문하고 화합과 조화를 처방해 달라고 목청만 높이고 있다. 그 결핍의 밑바닥에 우리의 오래된 과거가 모성처럼 숨어 있다는 사실을 잊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결핍의 바닥을 파헤친 콘텐츠가 '복고'였다. 동물원의 '혜화동' 가사처럼 '응답하라 1988'은 '잊고 지내던 친구에게서 걸려온 전화'였다. 같은 시대를 청춘으로 살았던 40~50대에게 응팔은 잊고 살았던 골목길과 이웃을 생각하게 했고 촌스러운 옛날로 부모세대를 치부했던 세대에게는 그랬구나에서 그랬으면 좋겠다로 변하는 스스로를 발견하는 아련한 유대감을 이끌어 냈다. 공감의 확산은 이야기보다 이야기 속에 살아 움직이는 사람의 정서에 있었다. 이성이 지향하는 직선이 정답이라며 모두가 돌진할 때 감성의 곡선도 충분히 좋은 답이라며 우공의 선택지에 표를 던지는 사회라면 다소 늦지만 그래도 괜찮다는 말이 소통의 공감대로 확산될 수 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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