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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나는 청바지를 좋아한다. 청바지는 질기고 튼튼할 뿐 아니라, 티셔츠나 자켓, 남방 등 어느 옷에나 잘 어울린다. 구김이 잘 가지 않아 세탁기에 돌린 다음 툭툭 털어 말리면, 굳이 다림질을 하지 않더라도 역시 툭툭 털어 입을 수 있다. 강변이나 숲길을 산책하다 쉬고 싶으면 근처의 어느 돌, 어느 나무 밑, 어느 풀밭에라도 특별히 깔개 없이도 앉아서 쉴 수 있다.

    유행이나 계절에 크게 구애를 받지 않고 한 번 장만하면 사철을 별다른 고민 없이 입을 수 있는 옷이다. 그래서 젊은 시절엔 티셔츠에 청바지를 거의 유니폼처럼 입고 다녔고, 지금도 갖춰 입어야 하는 자리가 아니라면 가방을 매고, 운동화를 신고, 청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집을 나서곤 한다.

 그런데 요즘은 이런 청바지 입기가 수월하지 않다. 다른 모든 것이 그렇듯, 청바지에도 변화의 물결이 일고 있기 때문이다. 바지의 밑위가 짧아져 허리가 아닌 골반에 걸쳐 입는 골반바지와 스판이 들어간 소위 쫄바지가 유행하면서, 청바지도 골반 청바지나 스키니 진으로 바뀌게 되었다. 젊은이들이야 자신의 젊음과 몸매를 과시하기에 좋은 패션이지만 나잇살이 오른 아줌마들은 뱃살이 올챙이처럼 두드러져 보이는 골반 바지나 레깅스처럼 몸에 찰싹 달라붙는 스키니 진을 입기가 쉽지 않다.

 청바지에 흠집과 구멍을 내서 낡고 너덜너덜하게 만드는 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있어 온 일이다. 어떤 의미에서 이 찢어진 청바지는 청바지가 갖는 의미와 상징성에 가장 부합되는 바지가 아닌가 한다. 청바지는 1960년대 미국의 히피문화, 1970년대의 통기타문화로 대표되는 자유와 낭만, 청춘, 평등, 그리고 기성세대의 권위에 대한 도전 등을 상징하는 옷차림이고, 구멍 나고 헤진 빛바랜 청바지야말로 다림질된 고급 정장바지의 대척점에 있기 때문이다. (2003년 4·24 재보선에 당선된 당시 개혁국민당 유시민 의원이 면바지에 노타이 차림으로 등원하자, 국회의원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차림새라며 다른 의원들이 야유를 보내고 퇴장해 의원 선서가 연기된 사건을 생각해보라. 그때 유시민 의원이 청바지라도 입었다면 아마 더 험한 장면이 연출됐을 것이다.)

 찢어진 청바지 하면 생각나는 일이 있다. 벌써 여러 해 전 일인데, 정류장 의자에 앉아 있으려니 찢어진 청바지를 입은, 대학생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도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할머니가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여학생에게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어디서 배워먹은 옷차림이냐, 돈이 없어 그런 옷을 입었느냐, 일본 사람들이 보면 우리나라를 떨어진 바지를 입는 거지나라라고 업신여길 것 아니냐는 내용이었다.

 당황한 여학생은 아무 대꾸도 않고 가만히 서 있다가 가장 먼저 오는 버스를 타고 가버렸는데, 할머니는 달리는 버스 뒤에 대고 한참이나 욕을 해댔다. 일본에서 가장 번화하다는 신주쿠 거리에 찢어진 청바지를 입은 젊은이들이 넘쳐난다는 사실을 알면, 우리나라의 위상이 실추될까봐 심히 걱정하던 그 애국지사 할머니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자기만의 고정관념으로 세상을 보고 섣불리 판단하는 것은 딱한 일이다.

 하지만 청바지를 즐겨 입는 나도 여태껏 찢어진 청바지는 입어보지 못했다. 이해와 실천은 다른 문제인가. 몸에 맞지 않아 요즘 청바지를 입지 못하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나이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나도 딱하긴 마찬가지다.

 얼마 전 텔레비전에서 청바지 만드는 공정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본 적이 있다. 청바지는 염색해서 파란색을 내는 것보다 그 이후의 처리가 더 중요하다. 봉제공장에서 만들어진 청바지는 자연스럽게 낡고 헤져 보이기 위해 여러 가지 가공 공정을 거친다. 가위로 자르거나, 세탁을 할 때 주먹만 한 돌들을 넣거나, 두드리고 긁어내고 손바닥으로 문지르는 등 온갖 방법이 동원됐다.

 프로그램 이름이 '극한직업'이었는데, 사람을 극한으로 몰아가는 것 뿐 아니라, 청바지 자체를 극한으로 몰아가는 것 같았다. 그처럼 굴리고, 두드리고, 연마를 해야 비로소 자연스럽게 주름이 지고 탈색된 바지가 된다고 하니, 청바지를 만드는 데님은 정말 질긴 천이다. 그렇게 시달려서 세상에 나온 뒤에도 십 수 년 이상을 너끈하게 견뎌내는 청바지. 낡고 오래된 것이 터부시 되는 세상에서 낡을수록 오히려 빛을 발하는 청바지. 비록 유행을 따라가기 어려워 오래된 청바지 서너 벌로 버티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청바지가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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