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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 상관없었던 것처럼
                                                                                   
                                                                                  이병률
 
혼자서 이별을 준비하는 사람을 알고 있다
십육 년을 같이 살았다는 사람하고
 
그는 이별을 하겠다는 사람과 나란히
결혼식에 가거나 장례식엘 간다
 
그리고 돌아와 자신의 흔적을 없애거나
너무 없애다
무엇이라도 남기지 않으면 그조차 의심을 받을 것 같기에
옷가지 두어 장을 남겨놓는다
 
누구도 왜 그러냐고 물을 수는 없다
거북하게 그래야만 했던 것처럼
이제는 수북한 안간힘을 내려놓고
깨끗이 그래야만 하는 일이 남아 있을 뿐
 
혼자 자물쇠를 하나 사서 다리 난간에 채웠지만
이번만큼은 강물에다 열쇠를 던지지 않는다
 
열쇠를 스스로에게 묻어버리고
무엇의 주인이 되지 않으려는 것에 대해
다시는 누군가에게 유적이 되지 않기로 하는 일에 대해
끄덕끄덕 작업해야 하므로
 

이병률 시인- 1967년 충북 제천 출생. 199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등단. 시집 '당신은 어딘가로 가려한다' '바람의 사생활' '찬란' '눈사람 여관' 외.
 
자물쇠로 채워진 사랑의 약속이 벌겋게 녹슬고 있다. 녹슨다는 것은 그래도 견딘다는 것이다. 붉은 눈물을 흘리면서도 지키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영원한 것은 없다"라고 말하면서 영원하길 바라는 이율배반적인 삶을 살아가는 중이다.

▲ 김루 시인
 이별을 준비하면서 그와 결혼을 한다. 이별을 생각하면서 그를 사랑하고 이별을 외치면서 그의 아이를 낳는다. 우린 무엇이 채워지지 않아 이별을 결심하는 것일까, 화자는 어쩜 채워지지 않아 이별을 결심하는 인간의 심리를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누가 누구를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유롭기를 원하면서 서로를 소유하고자 하는 본성에 충실하려 한다. 그런 마음을 '아무 상관없었던 것처럼' 무심하게 혹은 담담하게 서술하면서 시인은 자신의 흔적을 조금씩 없애 가는 사람의 마음을 묘사하고 있다. 흔적을 없애거나 너무 없애다 혹여 의심을 받지 않을까, 그마저 불안해 옷가지 두어 장을 남기는 어설픔은 재미있기까지 하다. 곁에서 우리는 그러한 흔적을 없애는 과정을 종종 지켜보면서도 아무도 그것에 관해 무어라 말할 수 없음을 안다.

 사랑이란 이름으로 우린 너무 많은 것을 관여하고 질책하며 살고 있진 않는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결혼을 하고 함께 사는 일은 누가 누구를 소유하기 위함이 아닌 걸 알면서도 우린자꾸 소유하고자 한다. 이 세상에 내 것이 있기는 한가. 어느 한때는 누군가에게 유적 같은 존재가 될 수 있기를, 아니 누군가가 내게 유적 같은 존재로 남아 있기를 바란 적도 분명 있었을 터. 무엇이 무엇의 주인이 되지 않기 위해, 서로가 서로의 유적이 되지 않기 위해 어떤 작업들을 하며 늙어가야 할지 숙연해 지는 밤이다.  김루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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