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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산공고 3학년 이선홍

8살 때였다. 서울에서 떨어져 살던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셨다. 그리고 우리는 끈 떨어진 연처럼 낯선 울산에서 '우리 세 식구'만 남게 되었다.
 어머니와 누나 그리고 아직 어렸던 나는 하루하루 살아내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래도 어머니는 최선을 다해서 우리를 위해 일하셨고 나도 할 수 있는 건 다했다. 전단지를 돌리고 고기집에서 아르바이트도 했다.
 그런데 제일 걱정은 지적장애가 있던 누나의 상태가 날이 갈수록 나빠진다는 것이었다. 누나가 더 이상 세상과 부딪힐 수 없는 상황이 되어서 누나는 보호시설로 들어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어머니가 무릎 연골을 다치셔서 입원을 하게 되면서 우리는 기초수급비로 삶을 버텨내는 생활을 시작했다.
  쥐구멍에도 볕뜰날이 있다고 하지 않던가? 평소에도 많이 지지해주시고 도와주시던 선생님의 도움으로 남구 장학재단에서 장학금을 받게 된 것이다. 실은 금액이 얼마인지가 중요하지 않았다. 이렇게 누군가가 따뜻한 마음으로 일면식도 없는 나에게 선뜻 도움의 손길을 내민다는 자체가 그저 고마워서 눈물이 났다.
 대학을 가는 건 생각하지도 않았다. 빨리 돈을 벌고 싶었고, 빨리 어른이 되어서 엄마가 고생하지 않게 힘이 되고 싶을 뿐이었다. 그래서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공무원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에 공부를 시작했다. 솔직히 그때는 간절함이 덜 했던 것 같다. 그렇게 1년을 보내고 2학년이 되면서 나는 제대로 공부를 시작했다. 학원은 꿈도 꿀 수 없었고 오롯이 나의 노력을 믿을 뿐이었다.

 그리고 만 18세가 되던 작년에 시험을 칠 자격이 생겨서 울산시 제2회 지방직 임용시험에 처음으로 응시했고 73.8대 1의 경쟁률을 뚫고 나는 9급 공무원 공채 최연소 합격자라는 영예를 얻게 되었다. 사실 지금도 믿겨지지 않는다. 가만히 있다가 다시 합격자 명단을 보기도 하고 볼을 꼬집어보기도 한다.
 그리고 내가 가장 어려웠을 때 마음의 의지가 되어 준 남구 장학재단에 이 감사함을 전하고 싶어서 연락을 드렸다. 벼랑 끝에 서 있던 우리 가족에게 장학금은 정말 큰 힘이 되었다고, 믿고 지원해 주신 덕분에 이렇게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고, 저같이 어려운 사람, 힘든 사람을 도와주는 공무원이 되겠다고 당당하게 말했다. 내가 앞으로 엄청난 돈을 벌거나 누군가에게 큰 도움을 줄 수는 없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받은 도움을 잊지 않고 나만을 위한 삶이 아닌 다른 사람을 돕는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모든 것이 힘들고 지칠 때 항상 옆에서 누군가가 힘이 되어 주었다. 선생님도, 친구들도, 이웃 아주머니들까지도 조금씩 도와주시고 늘 어깨를 토닥이며 웃어주셨다. 그 마음과 그 따뜻함이 감사해서 지금도 나도 할 수 있는 한 많은 봉사활동을 해왔다.

 크게 도움이 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보다는 그냥 나누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8개월 전부터는 울산수화협회에 수화를 배우러 다니고 있다. 내가 서툰 수화로 간단하게라도 말을 걸고 묻는 말에 대답이라도 해드리면 너무나 반가워하시고 좋아하시는 모습에 더 열심히 수화를 배웠다. 앞으로 조금 더 배워서 수화통역사로서 봉사를 꿈꾼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말은 '결초보은(結草報恩)'이다. 누가 이 말을 들으면 웃을지도 모르지만 이 뜻을 처음 알게 된 날부터 늘 마음에 새기고 있었다. 죽어서도 은혜를 잊지 않고 갚는다는 자세로 앞으로 예비 공직자로서 솔선수범하며 주민들과 소통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공무원이 되고 싶다.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꿋꿋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놓지 않은 희망의 끈은 바로 더불어 살아가는 정이라고 생각한다. 간절했던 나의 꿈을 포기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해서 이룰 수 있게 함께 해주신 남구 장학재단에 다시 한 번 깊은 감사를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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