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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는 셀프카메라라고 스스로 자신을 촬영하는 일이 많아지는 것 같다. 거기다가 사진이 더 '예쁘게' 나오는 어플로 자신을 촬영하기도 하는데, 여성들이 거울을 더 많이 보듯이 셀카를 사용하는 것도 혹 여성이 더 많을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즉 셀카가 거울로 쓰이는 것이다.

 회식이 있어서 모인 자리에서 한 여성 직원이 셀카를 찍으면서 옆에 있는 필자도 같이 찍게 되어 그 사진을 보내달라고 하였는데 자신의 모습이 별로라고 다른 사진을 보내왔다. 필자가 보기에는 괜찮은데 자신의 신체상에 대한 것은 좀 미묘한 데가 있어 표현하기에 어려움이 있는 것이며 그 느낌이 중요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사진을 찍을 때 사진사가 있는 경우는 그 표정이 더욱 미묘해진다. 웃는 모습을 찍기 위하여 '김치'라고 하면 얼굴이 더 일그러질 때가 있는 것이다. 사진사가 앞에  있을 때에 비해 스스로 찍는 셀카가 마음이 편할 것이며 분명 거울로서의 기능이 더 많은 것 같은데, 거울로 비추어본다는 것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일까.

 자신의 얼굴을 자신이 볼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거울을 사용하는 것이지만, 거울은 실제 구체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을 한번 되돌아보게 하는 것으로서 생각에서의 반추인 면이 있는 것이고 그것이 구체에 대한 추상인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런데 구체적 '생것'의 경험은 '거울'을 통한 조그만 경험으로 나누어져야 우리가 그것을 '동화'하는 데 충격이 완화될 수 있다고 융 심리학에서는 말한다. 신화에서의 메두사를 직접 보면 안 되듯이 거울로 비추어진 메두사를 물리치고 그 몸에서 페가수스와 뮤즈가 나왔듯이 거울로 상징되는 우리의 예술 문학 드라마 같은 것으로 우리의 경험을 동화시킬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는 많은 충격적 경험을 한다. 특히 예술적으로 많은 것을 표현해야 하는 예민한 감수성의 작가들에게는 그 경험으로 인하여 그들 삶이 고통스러운 것이 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고흐가 그런 인물인 것 같은데 그는 유난히 자기 자화상이 많은 화가라고 한다. 고흐는 인물화야말로 영혼을 담는 그림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모델을 살 돈이 없어 모델을 보고 인물을 그릴 수가 없어 스스로 자신을 그린 것이라고 한다.

 그런 이유도 많았을 것이지만 존재란 자신의 것이 문제인 것이기에 그렇다는 생각도 한다. 심리학적으로는 자기 자신에 대한 관심은 부정적인 면도 있다. 나르시시즘이라는 것이 그것이다. 유아가 아직 어머니와 자기 자신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을 때 어머니가 그의 입속의 혀처럼 굴 때에는 그의 조그만 몸짓에도 자신의 욕구가 만족되었던 것이므로 자기 자신을 전능한 것처럼 여긴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이 아니라는 것을 곧 알게 되고 좌절하면서 다시 부모님이 전능하다고 생각하는 시기를 거치는데 어쨌든 좀 비관적 전망이 비쳐지고 어른에겐 나르시시즘이란 자기에게 애착을 부착한 것이고 신화에서의 나르시스처럼 자신의 얼굴이 비치는 우물에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결말을 갖는다.

 예술의 본질은 단순한 자연의 모방이 아니라 그 이상의 것, 즉 표현에 있다고 생각한 고흐가 아이러니하게도 표현의 주체인 스스로의 성장을 이루지 못한 채 자신을 가로막은 고독 앞에 무릎 꿇고 마는 순간을 목격하는 것은 너무도 괴롭다고 한 고흐 연구가가 이야기 하는 것인데 예술가로서의 성취를 자신의 삶과 조화시키지 못하고 말았다고도 말한다. 예술이란 충격적 경험을 완화하는 거울이라고 해서 우리의 삶의 길이 항상 그런 거울을 우리에게 제공한다는 법이 있겠는가. 오히려 너무 강력한 시대의 비전에 사로 잡혔기 때문 훌륭한 거울로서 생생히 표현을 했음에도 개인적 삶은 비참했던 많은 예술가들이 있지 않나.

 윤동주의 '자화상'에도 그런 완화되고 훌륭한 거울인 우물에 비추어진 여러 긍정적인 "달이 밝고 구름이 흐르고 하늘이 펼치고 파아란 바람"에도 불구하고 그의 외적 삶이 행복했다고 할 수 있을까. 그의 삶은 "산모퉁이 돌아 논가 외딴 우물로 찾아가선 가만히 들여다본" 고독한 것이었다. 그냥 일상에서 사람들과 지내면서 거기에 빠져 있을 때는 그리기 힘든 것이 자화상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그리고 우물에 비춰진 자신의 모습이 미워져 그 우물을 떠났다가 그 미웠던 얼굴을 다시 보기 위하여 돌아오는 것인데, 필자는 우리의 미운 '그림자'를 드러내지 않고 그냥 '가면'으로 지내서는 우리는 결코 진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고 그래서 자화상을 그려낼 수 없는 것이기에 시인이 다시 우물로 돌아온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것이며, 그래서 셀카로 미운 자신의 모습도 찍을 수 있어야 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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