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창으로 투과된 볕살에 눈이 부신다. 잠깐씩 베고 누운 낮잠 속에 고향집 실개천이 흐르고, 텃밭에서 뜯어온 푸성귀를 집 옆 도랑물로 씻어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물 묻은 손등에 물비늘이 돋아나고 아지랑이도 실개천을 따라 흘러가곤 했다.

 도시의 외곽에 있는 작은 병원에 나는 한 달째 누워 있다. 이 한 달은 바쁘게만 스쳐온 지나간 긴 시간보다 내게 오히려 더 필요한 시간인지도 모르겠다. 눈을 떠보니 머리맡에는 제철도 아닌 석류 하나가 놓여 있다. 빈틈없이 속이 꽉 차서 껍질이 갈라진 것이 먹음직스럽다. 어머니는 나보다 당신이 더 좋아하는 석류 몇 알을 까서 내 입에 넣어준다. 병원 건너편에는 동시에 개업한 레스토랑과 숯불고기 뷔페에 사람들이 붐비고 있다. 

 정오, 병원의 점심시간은 참 정확하다. 못난 딸을 간병하는 어머니는 한 젓가락도 못되는 잡채와 옆 환자의 보호자가 가지고 온 홍어회를 내 앞으로 슬쩍 밀어놓는다. 홍어는 어머니가 좋아하는 몇 종류 되지 않는 생선 중의 하나다. 체했는지 소화가 안 된다며 빈 젓가락을 들고 있는 당신 앞으로 그 접시들을 다시 밀었다. 실랑이 끝에 둘이 반반씩 먹기로 했다. 그랬는데도 끝까지 수저를 들고 있어야 하는 쪽은 오히려 나였다. 어머니와 나는 늘 그랬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어디에서든 뿌리를 내리고 살면서도 떠나온 고향을 그리워하듯 나 또한 때도 없이 솟는 입덧 같은 그리움의 한 자투리에 자리 잡고 있다. 언제나 고향 생각 뒤에 따르는 것은 '웃픔이다'. 웃고 있는데 울고 싶은 마음을 사람들은 '웃픔'이라고 한다. 올바른 단어가 아니라도 표현하자면 내 마음이 그렇다. 그 그리움의 초입에는 항상 이성을 흐리게 하는 황금 보리밭이 물결치고, 두서없는 기억에는 들쭉날쭉한 살림살이의 유년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오랫동안 마음에 숨겨두었던 묵정밭을 이제는 헐어내고 싶다. 낙엽처럼 떠 있는 단편적인 기억들이 코끝에 와서는 사정없이 볼 붉은 사과빛깔로 물들어버리기도 한다. 먹는다는 것은 내 정서의 진한 침전물이면서 허기의 근원이기도 하다.

 쌀농사를 짓지 않았던 어머니는 주식인 보리를 방앗간에서 빻아 오셨다. 빻아 온 보리를 자배기에 담아 치대고 씻어 불려둔다. 불린 보리를 다시 가마솥에 넣어 초벌로 삶아 우선 한 바가지는 다음 끼니를 위해 바구니에 담아 초가집 처마 서까래 끝에 매달아 두었다. 곡기를 머금은 멀건 곡물방울이 댓돌 위로 뚝뚝 떨어져 사방으로 튀어나갔다. 남은 보리에 쌀 한 줌을 깨끗이 씻어 솥 가운데 안치고 다시 불을 지펴 밥솥의 김을 낸 다음 남은 잿불에서 뜸을 들인다. 밥이 다됐을 성싶으면 가마솥의 뚜껑을 밀어 흙벽에 걸치고 큰 나무 주걱으로 보리밥을 차지게 짓이겨 그릇에 담아냈다. 나는 어머니가 끼니를 준비하는 것을 부엌 앞에서 지켜보며 아궁이에 불을 지피기도 했다. 무청으로 만든 김치와 밥솥에 넣어 끓인 된장 뚝배기를 꺼내어 개다리소반에 함께 얹어 높은 마루 끝에서 어머니와 나는 마주 앉아 밥을 먹었다. 여름이면 보릿대로 얼금얼금 엮어 두툼하게 만든 자리를 높은 담 밑에 깔아 놓고 아침저녁을 해결하곤 했다.

 어머니는 매번 반쯤 남긴 보리밥을 내 앞으로 슬쩍 밀어 주고는 배가 부르다며 수저를 내려놓거나 그저 들고만 있으면서 딴전을 피웠다. 별달리 먹는 것이 없는 것 같은데도 당신은 늘 배가 부르다고 했다. 당신이 건네는 밥을 다 먹어도 나는 쉽게 포만감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어떻게 항상 배가 부를 수 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것이 늘 궁금했지만 어른들은 그냥 그러는 것인가 보다 생각했고, 먹는 것에 집착했던 나는 단 한 번도 엄마는 왜 배가 늘 부른지 물어 보지 못했다.

 그러다가 중학교에 가게 됐다. 학교가 너무 멀어 이모 집에서 학교를 다니기로 했다. 집을 떠나기로 한 어느 날 아침이었다. 개다리소반 가득 반찬이 실린 밥상 가운데 눈이 부시도록 휜 쌀밥이 고봉으로 담겨져 있었다. 너무도 놀란 나는 한참이나 멍하니 앉아 있었다. 먹고 싶었지만 도저히 달려들어 처음 본 듯이 허겁지겁 먹을 수가 없었다. 어머니도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어머니는 남의 집으로 다니면 끼니 거르기 쉽다며 조금 이르지만 생일 밥이라 생각하고 많이 먹으라고 했다. 지금 내가 간직하고 있는 단편적인 기억이 얼추 맞는다면 지금까지 어머니가 차려준 아니 다른 사람이 나에게 차려준 마지막 생일상이었다. 나는 지금도 생일이 되면 먼저 그 하얀 고봉밥의 기억 때문에 잠깐 먹먹하다. 그것은 너무도 어린 나이에 서로 떨어져 살아야 하는 통과 의례 같은 거였다. 당신이 말한 것처럼 참 오랜 시간 이리 저리 다니며 살았다.

 요즘은 가족들과 집 밥 먹기도 쉽지 않다. 많지도 않는 식구들이 밥 한 끼를 먹기 위해서 며칠 전부터 시간을 맞춰야 겨우 먹을 수 있다. 밥을 같이 먹는다는 것은 단순히 육신의 허기를 채우는 것만이 아니다. 다친 마음을 나누고 서로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 순간들이다. 그 순간들의 연속성으로 또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길이 됐다. 그런 차원에서 우리 밥 먹을까하는 말은 인사치레가 아니고 그와 마음을 나누고 싶다는 뜻이다.

 병원의 간이침대에 누워 있던 어머니가 식곤증을 못 이기고 쪽잠이 든 모양이다. 잊고 지낸 고향의 길 더듬어 도랑물이 줄줄 흐르던 작은 오두막으로 들어갔을까? 행여 그 기억에서 마른 솔가지로 밥을 짓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내 기억에 아직도 염장된 유년의 봄날이 그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은 해소되지 않은 갈증 같은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면 겸상으로 고봉밥을 담아 어머니를 놀라게 할 참이다. 잇몸을 드러내고 활짝 웃고 싶다. 춤도 한 번 추고 싶다. 가끔 어설프게 춤추는 딸을 보며 좋아하는 당신을 웃게 하고 싶다. 둘만의 시간으로 기억을 잃어가는 당신이 오래된 조각들을 떠올려 추억이라도 붙잡고 살아가는 힘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이다. 고봉밥 한 그릇을 거뜬히 비우고 어머니를 흐뭇하게 하고 싶다.

저작권자 © 울산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