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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나원 수필가·행복연구소 레아 대표
장나원 수필가·행복연구소 레아 대표

진동벨이 울린다. 주문한 케이크와 음료를 가져와도 맛을 보기까지 시간이 걸린다. 접시의 위치를 조정하고 포크를 사진 찍기 좋은 방향으로 놓아야 한다. 카페 로고가 찍힌 냅킨도 프레임 한구석을 차지한다. 찻잔 너머 무채색 일상에 색을 더한 듯 바다가 펼쳐져 있다. 커피 두어 모금 마실 틈이면 화보처럼 찍힌 사진이 각자의 SNS에 업로드된다. 사진은 한가로운 시간을 함께 누릴 친구가 있고 도심을 벗어나 낭만을 찾아 달려왔음을 보여준다. 이야기가 오가는 동안에도 실시간 달리는 댓글에 반응하느라 바쁘다.

 사진은 다양한 방법으로 자신이 행복한 사람임을 표현한다. 육아의 고통을 호소하는 사진인데 유모차가 129년 전통을 자랑하는 독일 제품이다. 칼에 베인 손가락을 찍었는데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시계가 팔목에 걸려있다. 이렇게 '있어 보이게' 잘 포장하는 능력을 일컬어 '있어빌리티'라고 한단다. '있어 보이다'와 능력을 의미하는 'ability'를 묘하게 합쳐 놓은 신조어다. 대놓고 드러내는 것보다 은근하게 표현할 때 그 능력의 진위가 잘 발휘된다.

 나는 무언가를 드러낼 플랫폼이 없다. 아주 잠깐 이용한 후 탈퇴했다. 처음엔 인간관계의 구획 정리가 되지 않는 것이 문제였다. 내 유년의 친구와 딸 아이의 학원 선생님이 연결되었다. 함께 일하던 동료와 친정 언니의 지인들이 이어졌다. 인생의 모든 인맥이 합집합, 교집합의 영역을 무너뜨리고 불규칙하게 넘나들었다. 신경 쓰이고 불편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피곤했던 것은 보는 일이었다. 인간은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 값비싼 자동차에 기대어 찍은 모습을 본 날은 수리비가 늘고 있는 내 차가 유난히 허름해 보였다. 유럽에서 낭만적인 한 때를 즐기는 사진을 보면 화장실 묵은 때를 벗기는 내 신세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남의 자식 일로 TV 앞에 앉은 내 아이가 사랑스럽지 않은 날도 많았다. 

 안 보면 되지 않냐 하겠지만, 온라인 플랫폼에 머물면서 보지 않는 건 쉽지 않았다. 타인과 비교하며 내 행복의 정도를 가늠하거나, 다른 사람의 기준으로 나를 평가하는 일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다. 마음이 불편하면서도 자꾸 보게 되는 얄궂은 날들이 이어졌다. 결국 앱을 삭제했다. 한동안은 소식을 공유하는 그들끼리 더 끈끈한 관계가 유지되는 듯 보였다. '다시 접속할까?' 하는 유혹에 흔들렸다. 내가 평온한 일상을 누리기까지는 수개월이 걸렸다.

 SNS를 끊고 느낀 소외감은 기우였다. 오히려 감당하기 버거운 인맥이 정리되었다. 온라인 인맥이 수천 명인 사람도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는 건 스무 명이 채 되지 않는단다. 제아무리 마당발이라고 해도 진정한 친구의 수에는 한계가 있다는 말이다. 덕분에 나에게 집중하는 시간이 늘었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사소하지만 감사한 일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행인 일을 찾아낼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정서적 자원을 모으듯이 스마트폰 앱을 이용해 기록도 했다. 그것은 타인에게 있던 행복의 기준을 내면으로 옮겨올 수 있도록 심리적 내공을 탄탄하게 해주는 연료였다. 

 '있어빌리티'라는 말이 생길 줄 누가 알았던가. 다행스럽게도 그 신조어가 탄생할 즈음에는 보고 보여주는 일이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 행복을 온라인까지 가져갈 필요도 없었다. 선물처럼 찾아온 특별한 시간에 차 한잔 마시며 감탄하고 케이크를 먹으면서 즐기면 그뿐이었다. 사진으로, 댓글로 박제되지 않은 시간이기에 설령 감정적 불편함이 있다고 해도 흘려보내기 쉬웠다. 다가올 또 다른 시간을 태연하게 기다릴 여유도 생겼다. 타인을 통한 욕망이 내 마음에 자리 잡을 수 없게 하는 능력을 얻었다고나 할까. 이름하여, '없어빌리티'. 나름대로 만들어 놓은 신조어다. 시간 도둑으로부터 인생을 태연하게 누릴 힘이다.  장나원 수필가·행복연구소 레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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