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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잠출 울산역사연구소 사무국장  
김잠출 울산역사연구소 사무국장  

'박정희 대통령의 반려견 스케치, 노태우 대통령의 퉁소와 김영삼 대통령의 조깅화, 김대중 대통령의 원예 가위와 노무현 대통령의 개량 독서대, 이명박 대통령의 자전거 헬멧…'모두 우리 현대사를 관통했던 역대 대통령의 소품들이다. 대통령의 물건은 시대와 주인의 성정, 취미를 알게 해 준다. 대통령의 상징물이자 현대사의 한 자락이 되는 단초를 제공하기도 한다.

울산에도 '대통령의 물건'이 있었다. 지금은 사라졌다. 2002년 6월까지는 울산시청(구관) 시장실 입구 복도에 걸려 있었다. 이름하여 '대통령의 삽'이다.

어느 날 시청의 대통령의 삽이 없어졌다. 건물은 리모델링됐고 옆에 신청사를 지었다. 출퇴근 때마다 삽을 바라보며 '국가경제부흥'을 역설하던 시장도 영면했다. 문수월드컵 구장 건설이 한창이던 때 시장이 구속됐다. 삽은 시장 교체기에 사라졌을 것으로 짐작된다. 누가 왜 어디에 보관 중인지 오리무중이다. 여러 번 탐문과 추적해 보니 모국장이 지하창고에 뒀다가 잃어버렸다, 모 간부가 몰래 가져가 자기 집에 보관 중이란 풍문만 떠돌 뿐 별무성과였다. 시간은 기억마저 빼앗아 가는 법. 대통령도 삽도 일상에서 모두 잊어버렸다. 울산공업센터에 관한 역사가 더 풍부하고 납도 현장의 스토리는 한층 더 두터워질 것인데 대통령의 삽은 어디에 있을까.

 

2002년까지 울산시청 시장실 입구에 걸어 놓았던 '대통령의 삽'. 
2002년까지 울산시청 시장실 입구에 걸어 놓았던 '대통령의 삽'. 김잠출 제공 

한국 경제 발전사에서 울산공업센터 기공식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장면이다. 사진 속 주인공이 쥔 삽 한 자루! 4천년 민족의 가난을 씻어내고 루르의 기적을 넘어 신라의 영성을 재현하겠다고 다짐하던 대통령은 온 힘과 악력을 쏟아 삽날을 밟았다. 바로 다이너마이트가 터지고 현장은 잔치 한마당이 되었다. 

사진 한장이 백마디 사연을 대신한다. 이 찰나의 기록이 바로 생생한 '현대사'요 '울산 발전사'의 출발이다. 오늘의 울산, 현재의 대한민국 산업과 경제의 시발은 누가 뭐래도 '울산특정공업지구' 지정과 기공식이었다. 5·16 후 국가재건최고회의는 1962년 1월 27일 각령 제403호로 특정공업지구로 지정하고 이후 2월 3일 오후 1시 15분 울산군 대현면 매암리 납도에서 공업센터 기공식을 성대하게 열었다. 박정희 의장을 비롯해 서울에서 온 내빈 200여명과 주민 3만여명이 몰려 "울산 고을은 역사상 처음으로 맞는 성사(盛事)로 흥분의 도가니에 빠졌다"고 한다.

울산공업센터 기공식에서 시삽 후 박정희 의장이 비서에게 삽을 전하고 있다. 울산시 제공
울산공업센터 기공식에서 시삽 후 박정희 의장이 비서에게 삽을 전하고 있다. 울산시 제공

정부는 기공식 이틀 전 50만 인구 규모의 울산공업센터와 문화도시를 위한 종합계획을 발표했다. 4,900만평 부지에 정유공장과 비료공장 종합제철소 등이 들어설 공장지구와 상가지구, 주택지구를 만들고 아파트 9동과 독립주택 1만8,500호, 외인주택 40호, 외인아파트 2동을 짓겠다는 계획이었다. 관광사업으로 목도 유원지, 일산해수욕장, 울기등대 조간지(釣竿地) 등을 꾸미기로 했다. 그해, 1962년 6월 1일 울산은 법령 제1068호로 시로 승격했다.

기공식 현장인 당시 울산군 대현면 매암리 '납도(納島)'는 작은 섬이었다. 개구리가 납작 엎드린 모양이라 해서 붙인 이름이다. 지금은 한국엔지니어링플라스틱 공장(남구 장생포 고래로 84)에 '한국공업입국 출발지 기념비'라는 기념비만 남아 있다. 박 의장의 시삽 장면과 학생들의 환송 박수에 거수경례로 답하는 사진이 함께 새겨져 있다. 원래 매암리는 대일과 양죽, 섬목과 뒷개 등 자연마을 7곳이 있었다. 1956년에 울산 최초의 현대식 공장인 삼양사가 들어섰다. 울산공단의 효시였다.

추억을 부르는 매개는 다양하다. 어떤 순간 만나는 물건이나 장소, 시간과 인물 때로는 갑자기 불어오는 바람일 수도 있다. 공업도시 울산 산업수도 울산을 있게 한 근원을 생각할 때면 언제나 대통령의 삽을 기억해야 한다. 너와 나 그리고 우리에게 데자뷰(deja vu·旣視感)로 다가오는 매개가 저 삽이었으면 좋겠다. 울산공업센터 기공식 사진과 함께 울산특별건설국과 울산특정경비사령부도 기억해줬으면 한다. 김잠출 울산역사연구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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