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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잠출 울산역사연구소 사무국장 
김잠출 울산역사연구소 사무국장 

울산 출신의 세계적 무용가. 한국 현대무용의 맹아. 일본에서 활동을 시작해 독일 헝가리 등 유럽과 미국은 물론 브라질, 아르헨티나 등 남미에서 먼저 알아주고 찬사를 받았지만 고향이나 우리 무용사엔 논의의 대상에서 빠져 있다. 최승희 조택원과 함께 '우리 민족의 자랑스런 3대 거장(1939.1.4. 동아일보)'으로 유럽 무대를 휩쓴 무용가라고 칭송받던 그는 박영인이다. 

박영인
박영인

 박영인(朴永仁, 1908年~2007年)은 일본에 가면서 고향과 가족, 고국을 지우고 일본을 선택했다. 일본에서 태어난 일본인으로 자처하며 귀화했다. 그는 “일본 쇼난(湘南)해안에서 태어나 유년, 소년시절부터 방랑의 별을 쫓아다녔다"는 글을 남겼고 “나는 세계인, 코스모폴리탄이다"란 말을 했다. 본래 성(姓)과 이름 대신 '나라 방 자 邦'를 차용했다. 예술에는 국경이 없다는 것을 증명하듯이 조선, 일본, 미국 국적과 세 개의 이름을 가졌다. 본명보다 에하라 마사미(江原正美) 혹은 예명 쿠니 마사미로 살았다. 그는 조선인임을 불편해한 것일까.

 10년간 유럽에 체류했고 1955년 이후 남미와 독일, 미국 대학에서 무용 지도자로 세계를 누비다 미국에서 99세로 사망했다. '이지적인 무용'이라는 평을 듣는 무용 이론가로도 유명했다. 그의 화양연화였을 독일 유학은 그를 유럽 무용계의 별로 만들기도 했지만, 나중에 괴벨스의 나치 선전부 소속으로 일본 스파이란 오명을 얻었다. 

 그는 결혼도 가족도 국적도 고향도 포기한 채 오직 춤에만 몰두한 자유로운 예술혼의 소유자로 자기 고향은 '세계'이고 세계 어디든 '예술하기 좋은 곳이 고향'이라고 믿었다. 

 박영인은 1908년 울산 학산동 122번지에서 태어나 양사초등과 부산중학교를 나와 부친의 권유로 일본 마츠에(松江)고등학교와 동경대 문학부 미술사학과, 독일 국립무용대학을 졸업한 철학박사로 일본에서 <방정미 창작무용연구소>를 만들었다. (kuni-creativedance.jp)

 13세에 영국인 선교사에게 처음 무용을 배우면서 서양무용에 심취했고 일본의 신 무용 창시자 이시이 바꾸의 제자가 되었다. 1933년 대학 2년생일 때 '無음악 무도론'을 표방하며 동경 일본 청년관에서 무용가로 데뷔했다. 이후 1935년까지 새롭고 자유로운 무용표현(창작무용)을 시도하며 특히 무음악 무용 실험에 매진했다. 

 2차대전 종전과 함께 연합군에 잡혀 시베리아를 거쳐 일본에 강제 송환됐다. 미국 전쟁정보국(OWI)은 그가 독일군 종군위문단의 일원으로 유럽 각지를 다니며 공연했고 중요한 일본 첩보원이라고 판단했다.

박영인의 독일 활약상을 소개한 매일신문(1938.5.20.)<br>
박영인의 독일 활약상을 소개한 매일신문(1938.5.20.)

 해방 전까지 서울에서 무용계와 교류하거나 무대에 서는 등 인연을 이어가다 고향에 단 한번 다녀간 뒤 인연을 끊고 철저히 일본인, 무용가로만 살았다. 독일에서 신흥무용을 배웠고 베를린 국립극장과 이탈리아, 헝가리 황실 오페라극장 등에서 24회 공연하며 발레와 서양무용은 물론 조선 무용의 미를 선보여 유럽인들의 부러움과 찬사를 받기도 했다. 당시 신문은 그의 유럽 활동을 많이 보도했다. '일본 무용가 방정미 씨가 조선농부의 춤을 가져서 특이한 무용을 해 백림시민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무용가 박영인 동양인 최초 베를린 국립극장 무대에' 등의 기사는 이름을 박영인과 방정미로 혼용하거나 일본인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History has failed us, but no matter! (역사는 우리를 저버렸지만 그래도 뭐 상관없어)" 소설 파친코의 첫 문장이다. 역사는 때로 사실이 왜곡돼 전해진다. 삭제되거나 묻히고 추방당한 역사는 또 얼마나 많은가. 

박영인 소개한 신문.
박영인 소개한 신문.

 

 그는 왜 고향을 지우고 고국을 부인하고 쿠니로만 살았을까. 해방 전까지는 고국에서 활동하려는 노력을 한 흔적이 분명 보이지만 설익은 공연 문화와 고국 무대에 설 수 없었던 어떤 회한이 있었는지 또 친일문제 때문인지 연구의 대상이다. 

 세계가 먼저 알아보고 인정한 순수 예술인, 무용가를 언제까지 낯설어하며 외면해야 하는가. 이제 그의 예술성과 무용 이론가와 지도자로서의 가치와 업적을 재평가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 예술사와 무용사가 한층 더 풍요롭고 훨씬 더 넓어질 수 있도록 말이다. 김잠출 울산역사연구소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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