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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 ⓒ장세련
삽화. ⓒ장세련

이백여 명의 군사들에게 둘러싸인 여덟 명은 이게 자신들의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물러날 수 없는 싸움이었다. 팽팽한 긴장감이 양쪽 사이에 흐르고 있는 그때 산채 안에서 임영복이 나타났다. 임영복은 느긋한 걸음으로 마당 가운데로 걸어 나왔다.

 "잠시 기다리시오."

 군사들은 임명복이 가까이 갈 수 있도록 길을 내주었다. 이선달의 앞으로 다가온 임영복은 차분한 어조로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은 아무리 용을 써보아도 이렇게 되게 되어 있었소. 위에서 이렇게 되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었소. 형씨는 아무것도 모르고 꼭두각시놀음에 놀아난 것일 뿐이오. 이렇게 된 상황에서 누구를 위해 목숨을 버린단 말이오. 마음을 고쳐먹고 나와 함께 순흥으로 내려갑시다."

 "순흥에 내려가서 내가 모시던 주인을 물어뜯으라는 이야기냐?"

 "물어뜯을 필요도 없을 걸세. 순흥은 지금 불타고 있을 걸세. 그냥 자네만 마음을 돌려먹으란 이야기일세. 순흥에 내려가지 않으려거든 여기서 동쪽으로 떠나가시게. 다른 산 사람들도 모두 떠나갔지 않은가. 뒤를 추적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네."

 "나더러 도망을 치라고? 갈 때 가더라도 자네와 승부는 끝내야 하지 않겠나? 내가 부탁을 한 가지 함세. 나하고 못 이룬 승부를 내고 여기 이 사람들은 건드리지 말고 태백산으로 갈 수 있게 길을 열어주게. 어떤가? 조선 최고의 살수가 두 사람이 될 수는 없지 않은가."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가? 양보할 수는 없지."

 임영복은 경군을 이끌고 온 대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자신이 죽게 되어도 이 사람들을 곱게 떠나갈 수 있게 건드리지 말고 자신이 이겨도 죽은 사람만 남겨두고 나머지는 건드리지 않도록 했다. 언양 무사들 다섯과 산 사람 둘은 들었던 무기를 거두고 물러섰다. 관군들도 모두 무기를 거두고 두 사람을 에워쌌다. 소란스럽던 산채의 공기는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자. 이제 들어오시오. 시간은 무제한이오. 한 사람이 죽을 때까지요."

 "그렇게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을 것이네."

 마당 한가운데서 두 사람이 맞붙었다. 두 사람의 손에 든 무기는 아무것도 없었다. 임영복의 주먹은 단단하게 쥐어져 있었다. 발걸음도 짧으면서 무거웠다. 자신의 눈앞에 다가오는 것은 무엇이든 주먹으로 부숴버린다는 자세였다. 이선달은 손을 편 채 손바닥의 방향을 자주 바꾸었다. 손은 공격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방어를 위해 사용하겠다는 자세였다. 발걸음은 가볍고 빨랐다.

 임영복은 이선달의 곁으로 슬금슬금 가까이 다가서려 하고 이선달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려고 했다. 갑자기 이선달이 한 걸음 반을 뒤로 물러서더니 방향을 바꿔 임영복에게로 달려들었다. 그것도 그냥 달려든 것이 아니라 중간 지점에서 양쪽 손바닥을 땅에 대더니 발이 공중으로 치솟아 올랐다. 공중에서 팔랑개비처럼 돌더니 땅에서 두 길 이상 솟구쳤다. 그러는 사이 임영복은 한 걸음 뒤로 물러났을 뿐이었다.

 공중제비를 돌던 이선달의 오른발이 임영복의 얼굴을 내리찍었다. 임영복은 붙박이처럼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두 눈을 부릅뜨고 공중에서 내려오는 이선달의 오른발을 주시했다. 막 발바닥이 콧등을 찍으려는 순간이었다. 임영복의 주먹이 턱 앞으로 올라가 내려오는 발바닥을 쳤다. 아주 짧은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방어를 한 것이었다. 그런데 과연 주먹으로 발바닥을 가격해서 효과가 있을지 의문이었다. 아무래도 주먹이 발바닥보다 강할 수는 없었다. 구경하던 군사들과 언양 무사들은 임영복의 콧대가 곧 무너질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발바닥과 주먹이 만나는 순간 이선달의 몸이 잠시 움찔했다. 충격을 받았다는 이야기였다. 공중에 솟아올랐던 이선달의 몸이 가뿐하게 바닥에 내려앉았다. 다시 상체를 일으키는데 약간 중심이 흔들렸다.  

 이번에는 임영복이 빠른 걸음으로 가까이 다가가 주먹을 뻗었다. 왼 주먹 오른 주먹을 번갈아 내뻗는데 짧게 끊어쳤다. 주먹을 뻗었다 거두는 시간이 순식간이었다. 주먹 한 방에 요절낼 듯 온 힘을 다해 휘두르는 것이 아니었다. 마치 다듬잇돌 위의 빨래를 두드리듯 했다. 이선달은 주먹을 피하고자 상체를 전후좌우로 흔들었다. 빠른 주먹만큼이나 민첩한 몸놀림이었다.

 주먹을 피한 이선달의 상체가 앞으로 고꾸라지는가 싶더니 오른발 뒤꿈치가 임영복의 턱을 강타했다. 엉덩이 뒤로 차올린 발이 어떻게 앞에 있는 상대의 턱을 걷어찰 수 있는 것인지 기가 막혔다. 턱을 얻어맞은 임영복이 뒤로 몇 걸음 물러나며 휘청거렸다. 조금 있으니 찢어진 입술에서 선혈이 흘러나왔다. 이선달이 승기를 잡는 듯했다.

 한 마리 학처럼 가뿐하게 솟아오른 이선달이 무릎 차기로 재차 턱을 노리고 들어갔다. 무릎이 거의 턱에 닿을 뻔한 순간이었다. 임영복의 주먹이 짧은 거리에서 올라오는 무릎을 찍었다. 임영복이 영월각동의 돌밭에서 어릴 때부터 호박돌을 깨드리던 동작이었다. 구부린 이선달의 무릎이 그대로 쭉 펴졌다. 솟아올랐던 몸이 그대로 땅으로 떨어졌다. 안전하게 착지를 하는 것 같았는데 바닥에 주저앉고 말았다. 주먹과 무릎이 부딪치는 순간에 호박돌이 깨지는 듯한 뻑 소리가 나긴 했었다. 이선달이 바닥에 주저앉는 걸 본 구경꾼들은 저마다 입을 쩍 벌렸다. 

 이선달이 바닥에서 일어서려고 힘을 주었는데 상체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주먹에 얻어맞은 무릎이 완전히 부서진 듯했다. 두 팔을 바닥에 대고 몸을 비틀어 일어서기는 했는데 다리 하나를 바닥에 세울 수 없었다. 한쪽 다리의 관절이 부서져 마음대로 놀았다. 임영복은 공격 자세를 풀고 이선달을 노려보기만 했다.

 한쪽 다리로 일어선 이선달은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무릎뼈가 완전히 부서진 듯했다. 임영복이 절룩거리는 이선달에게 다가갔다. 이선달은 자세를 바꿔 보려고 다리를 움직이다가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임영복은 주저앉은 이선달에게 다가가 남은 다리의 무릎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이선달이 외마디 비명을 질렀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이선달은 양쪽 무릎뼈가 부서져 더 움직일 수가 없었다.

 "자 이것으로 모두 끝났소. 당신들은 약속대로 동쪽으로 사라지시오. 그게 싫다면 여기서 목숨을 버려도 좋소."

 언양 무사들과 산 사람 둘은 이선달에게 달려들어 양쪽 팔을 잡고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양쪽 팔을 잡고 부축해 가려던 생각을 접어야 했다. 양쪽 무릎이 완전히 결딴나 조금도 바닥에 디딜 수 없었다. 산 사람 중에 덩치가 큰 자가 이선달을 둘러업었다.

 "얼른 내 눈앞에서 사라지거라. 마음이 바뀌면 목숨 붙이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하하하.

 임영복의 웃음소리가 소백산 골짜기를 쩌렁쩌렁 울렸다. 등에 업힌 이선달이 산 사람을 잠시 멈추게 했다. 산 사람이 등을 돌려 임영복을 마주 보게 해주었다. 김태환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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