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이든 수필이든 시든 책 속에는 사람이 있다. 참 다양한 삶의 모습이 펼쳐진다. 이타적인 사람과 이기적인 사람, 선한 사람과 악한 사람, 어린이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같은 삶이 없다. 어떤 삶은 응원을 하게 되고, 어떤 삶을 보면서는 화가 나기도 한다. 주인공의 삶에 감정이입이 되는가 하면, 살면서 만나질까 두려운 인물도 있다. 수기를 읽을 때면 공감과 외면이 더욱 선명해진다. 대개가 고난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같은 시대를 살면서 겪었던 어려움이나 환희가 내 일처럼 느껴지고, 난관을 슬기롭게 극복하는 과정에 무릎을 치기도
동시는 어른이 아이의 마음으로 쓰는 시다. 아이들의 정서를 이해하고 아이들의 눈높이에 맞춰 동심으로 풀어내는 서정이다. 시대가 바뀌면서 예전보다는 아이들이 영악해졌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손자들만 봐도 내가 아이를 키울 때와는 다르다. 각종 문화적인 자극을 일찍 받으니 무엇을 아는 시기가 빨라졌음을 실감한다. 들으면 깜짝 놀랄 만한 말을 하기도 하고, 낱말이나 상황에 대한 이해도 빠르다. 어른들이 잊고 있는 역사적 사실을 새롭게 해석하기도 한다. 다양한 매체를 접하고 사는 까닭이긴 하지만 아이는 아이다. 무엇보다도 단순하다. 비틀어
우리는 과연 단일민족일까? 역사를 되짚어 보자면 그렇다고 단언할 수만은 없다. 고려 때 이미 혼혈이 시작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의 역사는 외침과 함께였다. 우리나라의 지리적 특성은 인근 나라들의 길목일 수밖에 없고, 이런저런 이유로 우리나라를 오갔던 그들은 곱게 지나다닌 것이 아니었다. 약소국에서도 약자들인 여성들은 그 길목의 가장 큰 피해자였다. 성적 유린으로 숨어서 낳은 자식이 생겨났음은 슬프지만 인정해야 한다. 드러난 이야기의 주인공도 많다. 환향녀나 기황후 같은 인물이다. 이들은 혼혈과 절대로 무관할 수가
요즘 청소년들은 부족한 것이 없어 보인다. 잘 차려입은 옷에 구김살 없는 표정들, 주변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는 행동은 더러 눈살을 찌푸리게 할 만큼 거침이 없다. 그러나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보면 그들의 욕구가 드러난다. 겉으로는 부유해 보이나 어딘지 위축된 모습도 있다. 무기력한 발걸음은 질식할 듯 억눌린 자존감이 할딱거리고, 거친 말투에는 향기가 없다. 그런 아이들일수록 눈여겨보아야 한다. '비스킷'(김선미/위즈덤하우스)은 이런 청소년들의 자존감을 다룬 판타지 소설이다. 부모의 학대로 주눅 든 아이, 주변의 관심에서 소외된 사
라면은 많은 이들에게 친숙하다. 내가 아주 좋아하는 것도 라면이다. 간편하게 한 끼 식사를 해결하기에 충분한 까닭이다. 쫄깃쫄깃 탱글탱글한 면발을 생각하면 저절로 군침이 고인다. 콩나물을 넣으면 아삭한 식감도 즐길 수 있고, 대패삼겹살 두어 조각과 계란과 파를 곁들이면 영양면에서도 부족하지 않다. '계란떡만두햄치즈김치라면'(장이랑/폭스코너)이라니 싫어할 수 없는 재료들을 다 넣은 맛은 어떨까, 라면 한 개가 커다란 냄비를 다 채울 것 같다. 양적으로도 넉넉할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노란 표지의 책을 보면서도 군침이 흐른다. 이 책에
아주 오랜만에 나의 학창시절을 돌아보게 되었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 시절 학교에서 있었던 일들을 돌이켜 보았다는 것이 옳다. 학교에서는 언제나 이상한 소문들이 돌았다. 친구들이나 선생님의 주변 이야기보다는 학교 건물이나 운동장, 미술실, 음악실, 과학실 등의 장소에 관한 이야기들이었다. 대개는 괴담이었다. 아무도 없을 때면 들리는 오르간 연주음, 머리카락으로 얼굴을 가린 여자의 실루엣, 누군가가 흐느끼는 소리, 아무도 없는 과학실에서 갖가지 실험도구들이 부딪치는 소리, 화장실 귀신 등의 이야기들은 학교에 혼자 남아 있는 시
'내 안의 안'(이근정/푸른 책들)은 청소년 시집이다. 청소년의 외로움과 아픔,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노력을 담은 책이다. 기성세대의 기대에 억눌린 채 '내 안의 안'을 들여다보는 숱한 화자들이 다양한 마음을 써내고 있다. 많은 모호함 속에서도 성장이 멈추지 않는 청소년들이 갖가지 모습으로 숨어 있다. 어른들이 보면 아무것도 아닌 우정과 사랑, 자신의 꿈과 부모의 기대 사이에서 겪는 진로문제 등 갈등하는 모습도 담겨 있다. 때론 은유적이기도 하고 때론 직설적이지만 어른들에게는 더러 당황스럽기도 한 그들의 질풍노도가 적나라하다.
청소년기는 어른과 아이가 공존하는 시기다. 어른스럽게 행동하려는 모습이 어쭙잖은 흉내로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 경험한 것보다 경험하지 않은 것이 많은 세대여서 자신의 꿈과 부모의 기대 사이에서 혼란을 겪기도 한다. 새로운 경험에 가슴 설레면서도 두려움에 휩싸이기도 쉽다. 그러다 보니 즉흥적인 판단으로 갈팡질팡하는 일도 많다. 자신의 행동에 책임질 수 있는지를 생각하기보다 감정에 따라 움직이기 쉬운 시기이기도 한 청소년기. 이성 친구에게서 느끼는 감정의 정체를 몰라 헷갈리다 보니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서성이는 날도 많다. 어설픈 판단
'모든 순간이 별'(장세정/상상)은 동시집이다. 동시란 어린이를 위하여 어른이 쓴 시를 일컫는다. 동심이 없으면 쓸 수 없어서 늘 어린이의 마음을 헤아려야 한다. 어린이들은 긴 이야기를 싫어한다. 오래 버티는 힘이 약하다. 시늉말의 반복으로 운율을 살린 동시가 많은 것도 이런 어린이들의 특성과 무관하지 않다. 몇 번만 읽으면 저절로 암송이 되고 오랜 시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 시편들. 초등학교 때 배웠던 동시작품들이 지금껏 철마다 웅얼거려지기도 한다. 그런데 요즘 동시들은 어찌 된 일인지 열 번을 읽어도 쉽게 암송이 되지 않는다.
사람은 각자의 생각이 다르다. 무엇에 대한 느낌도 다 다르다. 좋고 싫고에도 농도가 있고, 높낮이가 있지 않은가. 채도가 비슷한 감흥이라도 조금 구체화되면 자신의 생각과 엇나간다는 생각을 하기 쉽다. 순음인 낱말 하나도 농음(濃陰)으로 표현하면 괜한 긴장감이 생기는 문장이 되기도 한다. 그 때문에 누군가에 대하여, 무언가에 대한 자신의 의견에 공감하게 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런 생각을 글로 적어 독자를 끌어들이기는 더욱 어렵다. 책이 팔리지 않고, 책을 찾는 층이 나날이 얇아지는 현대에는 더욱. 그래서일까. 요즘은 서평을
빛나는 사유, 시가 되고 동화도 될 만한 문장들. 고급스러우면서도 부담스럽지 않아 독자로서도 품격과 자부가 보장되는 책을 읽었다. 정성스럽게 차린 고급스러운 한정식을 마주한 느낌이다. 수필을 읽고 받는 감동은 흔치 않아서 영혼이 오래 그득할 것 같다. 시든 수필이든 소설이든 동화든 모든 문학작품은 감동이 최고라는 생각을 굳힌다. '흐르는 것은 시간이 아니다'(최민자/연암서가)는 저자의 수필 선집이다. 내가 읽은 저자의 수필은 모두 주옥(珠玉)이다. 그중에서 골라낸 작품들이라니 기대했고, 기대 이상이었다. 흐르는 것은 시간이 아니라니
대추는 꽤 늦게 열매를 맺는다. 아주 작은 열매가 올망졸망 달린 모습은 경이롭다. 그렇지만 그뿐, 여린 열매가 붉어지는 걸 보면서도 그러려니 지나치곤 했다. 그 안에 우주가 들어있을 거라는 생각은 추호도 해본 적이 없다. 국화 한 송이를 피우기 위해 소쩍새가 울고, 간밤에 무서리가 내렸다는 것처럼 시인이 읽어내기 전에는 깊이 들여다보지 못했다. 시인의 안목은 시를 읽는 독자의 안목까지 넓혀준다. 늦가을 햇살이 내려앉은 마당을 본다. 초록으로 빛나던 잔디마저 누렇게 퇴색한 채 햇살에 겨운 모양새다. 이파리를 모두 떨어뜨린 나무들은 앙
대개의 편의점은 내부 규모가 크지 않다. 다소 협소하다고 느끼는 공간에 짜임새 있고 깔끔하게 진열된 온갖 잡화들. 간단한 요기를 할 수 있는 즉석식품까지 있어서 간단하게 허기를 달랠 수도 있다. 현대인에게 꼭 필요한 물품들이 가지런히 놓인 진열대가 24시간 고객을 기다린다. 보기 좋게 놓인 물건 중 필요한 것을 고르는 일은 쉽고 간편하다. 그야말로 편의점이다. 간단한 요기로 허기를 달랠 수 있는 곳인 만큼 넉넉함을 느낄 수 있는 곳은 아니다. 꼭 필요한 것을 간편하게 구할 수는 있으나 이것저것 비교하고 고를 만큼의 다양성이 부족한
잘 쓴 글은 술술 읽힌다. 깔끔한 문체, 다양한 정보,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경험담은 자기계발서의 요소다. 그럼에도 자기계발서는 이미 알고 있는 내용이 대부분이어서 웬만큼 알려진 이가 쓴 것이 아니면 흥미를 끌기가 쉽지 않다. 인기 작가나 성공한 전문가의 자기계발서가 날개 돋친 듯 팔리는 걸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다. 이번에 접한 (한미라/지식공감)는 이런 공식을 깨기에 충분하다. 한 마디로 특별한 책이다. 자신의 어린 시절과 떠나온 고향 이야기로 시작하는 서두는 특별할 것이 전혀 없다. 신변잡기나 끼적인
읽다 만 시집을 다시 읽는다. '만 개의 손을 흔든다'(송은숙/파란시선)이다. 시인은 어딜 향해 손을 흔들까? 고개를 갸웃하다가 그래, 숱한 손짓이 있어야만 다양한 시를 쓸 수 있을 테지, 고개를 끄덕인다. 제목에는 어떤 은유가 숨어 있을까, 싶으면서도 시집의 제목을 보면서 불상 오천 개를 떠올린다. 단세포적인 참 엉뚱한 생각에 풋, 웃음이 터진다. 난마처럼 얽힌 손가락이 어수선해 보이던 천수보살을 보았던 기억도 따라붙는다. 서로 아무런 연관도 없는 생각들을 이어붙이면서 시집을 펼친다. 시편의 낱말은 물론 비어 있는 행간마다 숨어
책장을 정리했다. 여섯 개가 넘는 책장이 빼곡하다. 가지런히 꽂힌 책 위로도 누운 채 얹힌 책들이 넘쳐났다. 꽂힌 책 앞으로도 켜켜이 쌓인 책들. 언젠가는 다시 읽고 싶다는, 미처 읽지 못했기에, 읽었던 감동을 되살리기 위해 등등의 이유로 버리지 못한 책들이다. 이사할 때마다 남편의 지청구를 가장 많이 듣는 짐이었던 책책책들. 문득 미련 또는 욕심이며 허영이고 집착의 물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번을 정리했음에도 여전히 책장에 갇힌 활자들이 갑갑함을 호소하는 듯도 했다. 여전히 다시 읽고 싶은 책만 두고 몇 상자를 다시 정리했다.
20대의 어느 날 목욕탕에서 할머니들을 만났던 일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여학교 때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며 서로의 등을 밀어주던 모습이다. 그 웃음이 하도 환해서 낯설었다. 구겨진 종이처럼 주름투성이인 얼굴, 쭈글쭈글한 손등을 흘깃거리면서 살짝 기막히기도 했던 기억이다. 저런 모습이 여학교 때랑 같다니 자위하는 듯한 상대방의 칭찬에 서글펐던 것은 저렇게 늙어서도 소녀처럼 깔깔거릴 일이 있을까, 싶어서였다. 그럴 일이 무얼까 궁금한 것이 아니라 의아했다. 사는 낙이 없을 것 같은 나이에도 친구를 만나면 즐거울 일이 있을까 믿어지
쿨하다는 말이 대세다. 인터넷 사전에 '쿨하다'는 말이 나올 정도다. 꾸물거리거나 답답하지 않고 거슬리는 것 없이 시원시원한 성격을 일컫는 말이다. 단호하나 건조하지 않아서 쿨한 사람을 만나면 기분이 좋다. 실수든 실패든 인정을 잘하는 사람. 지난 일에 미련을 갖기보다 새로 닥칠 일을 생각하는 모습에 청량감이 든다. 상황정리에 빠른 만큼 새로운 상황에 적응할 거라는 안도감과 함께. 인간관계에서 쿨한 성격의 상대를 만나면 개운하다. 박하사탕을 먹은 듯 속이 뻥 뚫리는 느낌이었다. '웰컴 문래'(강이라/도서출판 득수)를 읽기 전까지는.
마을 길을 걷는다. 한없이 조용하다. 주위는 푸르른데도 생기가 없다. 모든 소리가 죽고 더위에 지친 풀들이 누워 있는 길, 곤충들도 납작 엎드린 채 쉬고 있다. 배롱나무만 진한 꽃분홍을 매달고 더위를 버티는 중이다. 작열하는 태양에 항거하듯 붉음을 겨루는 듯하다. 몇 발짝 앞은 그늘이 깊다. 서둘러 그늘로 들어선다. 간간이 부는 바람이 햇살에 뜨거워진 이마와 목덜미를 식혀준다. 가을바람 같지는 않으나 무척 반갑다. 길 양옆으로 높게 자란 소나무가 터널을 이룬 덕분이다. 4월 말에서 5월 초까지 송홧가루를 흩날리던 나무들. 문을 닫아
세상은 변한다. 인간의 희망에 따라 발전하기도 하고, 인간의 의지와 관계없는 변화도 있다. 어떻든 변화는 기대며 희망이다. 이런 변화의 과정에서 새로이 생겨나는 것이 있는가 하면, 필요성이 사라져 도태되는 것도 있다. 삶과 죽음은 이런 원리의 한가운데 있는 진리다. 누구도 바꿀 수 없고, 바뀌어서도 안 되는 세상 진리의 중심축이다. 어둠이 있어서 빛이 더 드러나고, 악이 있어서 선의 가치가 더욱 존중되듯, 삶도 마찬가지다. 죽음이 있어서 아름다운 것이다. 죽음이 없다면 삶은 의미가 없는 지루한 영속성을 지닌 현재일 뿐이다. 인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