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안다방 만세!연안다방에는 아직도 김정숙 사장님(이하 여사, 76)이 버티고 있다. 장생포 사랑방이 된 이 다방에 가면 장생포 돌아가는 소식을 손금 보듯 훤하게 알 수 있다. 그래서 기관장들이 장생포에 오면 먼저 들리는 곳이기도 하다. 김 여사님에게 장생포가 고향이냐고 물었다. 그녀는 말보다 먼저 고개를 흔들었다. 부산 동구 초량 살다 철공소를 운영하는 아버지를 따라서 장생포에 올 때 나이가 겨우 6살이었다고 했다. “여기 와서 일주일 만에 6·25전쟁이 발발했고 어른들이 모여서는 걱정하는 이야기들을 들었다"며 어린 나이에도 사회
시작하면서 고래관광특구로 한창 뜨고 있는 울산시 남구 장생포에 가면 울산세관 통선장 맞은 편 골목 안에 울산 최초다방 영업신고증을 당당히 내민 연안다방이 있다. 연안다방, 다방 이름에서 항구라는 냄새가 진하게 난다. 그 연안다방을 찾아가 고래 포구 장생포 다방 속살을 들여다보고자 했다.울산다방의 역사를 보면사실 지금까지는 필자를 제외하면 울산에서 누구도 울산지역 다방의 역사에 관심을 가진 경우가 드물다. 그래서 울산 최초다방이 어디인지는 말하기가 곤란하다. 울산 토박이들도 어느 다방이 울산 최초다방이 어디라고 함부로 말하기는 어렵다
디자인 거리 다방들을 대략 둘러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풍차다방에서 전하동 방향으로 100m 거리에 남다방이 있음도 확인했다. 남다방은 최근 시외버스정류장이 문을 닫자 점포를 내놨다. 보증금 1,000만원에 월 50만원이다. 남다방에서 방어진초등학교 정문 바로 못 미쳐서 오른편에 종점다방이 있다. 사실 비목다방과 종점다방, 하나다방은 이번에 새로 찾아낸 다방이다. 방어진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들러야 할 것 같은 다방이 종점다방이다. "종점이라." 이 다방에서 커피 한잔하고 나면 뭔가 밀린 숙제를 다 한 느낌이 들것이다. 왜냐하면,
시작하면서2022년 늦봄, 불쑥 방어진 다방에 가서 커피나 한잔할까 했다. 혼자 가기는 뭣하고 해서 친구 홍대식에게 연락했더니 마침 쉬는 날이라고 했다. 둘이서 희희낙락 방어진으로 향했다. 10년 전인 2011년 초봄, 방어진에서 다방을 찾아다니며 알밤 줍듯 추억을 주웠던 때의 그 다방들이 그대로 남아있을까 궁금했다. 방어진 디자인 거리를 중심으로 백열등처럼 오밀조밀 매달려있던 다방들이 눈앞에 선했다. 참으로 다행이었다. 디자인 거리가 환경개선을 마치고 깔끔한 거리가 됐다. 방어진은 일부 아파트가 지어진 것을 빼고는 골목이나 집들도
그리고 무지무지 그간의 세월이 궁금했다. 이 다방에 들락거렸던 기억들을 주마등처럼 더듬기 시작했다. 마지막 들렀던 날이 언제였을까. 아마 승용차를 사고 난 뒤부터였지 않았을까. 내가 언제 승용차를 샀지? 그랬다면 2000년대 초반까지는 가끔 왔을 것 같았다. 현대차를 그만두고 자동화 전문기업을 창업했고 경험 부족으로 회사가 망했을 즈음 마침 창간한 지역 신문사에 기자로 입사했다. 기자 시절, 이 다방에서 원고지를 꺼내놓고 기사를 쓰기도 했었다. 시내버스노선이 좋았기 때문에 자주 찾았다. 사건담당 기자들은 취재용 차를 타고 다녔지만
시작하면서태화다방 흔적을 찾아 나서던 날은 전신에 힘이 쑥 빠지는, 그냥 아무 데나 기대고 싶은 나른한 봄날의 끝자락이었다. 올해는 초봄 가뭄으로 꽃들이 제대로 필까 했는데 가뭄 덕분에 오히려 벚꽃이 오래 피었다가 졌다. 지금은 쌀밥 꽃(이팝꽃)이 지천이다.(2018년 봄날 기억) 울산은 다른 도시들보다 이팝나무 가로수가 많다. 새마을 노래가 한창이던 시절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에서 기념식수로 이팝나무를 심었다고 한다. 국민이 모두 쌀밥 먹는 그날을 앞당기기 위해서라는…. 쌀밥 꽃이라 불리는 이팝꽃은 꽃말이 뭘까, 즉답으로 영원한
그때를 추억하다2013년이니까 지금(2024년)으로부터 거의 10년 전이다. 직장을 그만두고 백수로 살면서 울산지역 다방을 찾아다닐 때 호계역 앞에 귀향다방이 영업하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아직도 그 다방이 남아있구나' 불현듯 가보고 싶었다. 1987년 10월 잘 다니던 현대자동차에 사표를 내고 자동화 기계 가공 공장을 한다면서 호계 수성 마을 어느 소를 키우던 마구간을 개조해 공장을 차렸다. 직원도 7~8명이 됐다. 공작기계를 설치하고 기계 앞에 웃고 있는 돼지머리를 올려놓고 정성스레 절을 하면서 희망찬 미래를 설계했던 20대
시작하면서 역전 다방 이름 치고 귀향다방만큼 정감 있고 멋있는 이름이 또 있을까 싶다. '귀향다방'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그리움이 물씬 묻어나는 이름이다. 그 다방이 울산 북구 농소읍 호계 역 들머리에 2020년 말까지 문을 열고 있었다. 그 세월이 장장 80년이다. 고향을 떠날 때 이 다방에서 가족들과 이별의 아쉬움을 나누었던 사람들은 객지에서의 설움이 더할수록 이 다방이 그리웠을 것이다. 도로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 호계가 농소 일대 중심이기 때문에 호계역은 떠나고 돌아오는 사람들로 늘 붐볐다. 호계역에 내려서 대합실을 지나
뒷말이지만 설운도라는 이름을 지을 때 운도는 지어놓았는데 성을 붙이는 과정에서 오래 고민했다고 한다. 최운도, 박운도, 정운도, 김운도 라고 해도 뭔가 2% 부족했다. 그래서 작곡가 선생이 큰맘 먹고 설운도라고 지었다고 한다. 이름 덕분이었을까, 그에게 하루아침에 천재일우의 기회가 왔다. 바로 KBS한국방송이 주관방송사로 남북 이산가족 찾기 행사를 개최했다. 설운도는 절호의 기회에 남북 이산가족의 아픔을 담은 곡 '잃어버린 30년'을 불렀다. 방송현장은 눈물바다가 됐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그리웠던 삼십 년 세월
기회의 땅 울산 몰려온 청춘들로 언제나 북적 울산이 산업화로 굴기하던 시절, 우후죽순 솟아오르는 공장 굴뚝처럼 울산다방들도 함께 굴기했다. 울산 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던 1970년대와 80년대에는 어느 다방을 막론하고 마담과 레지를 구하지 못해 안달이 났다. 울산 근방은 물론이고 시골 읍 단위 다방까지 가서 마담과 레지들을 모셔 와야 왔다. 다방 레지 등급이 포니, 스텔라 등 승용차 기준으로 정해지던 그 시절이 울산은 전성시대였다. 하지만 직장 구하기가 누워서 떡 먹기보다 쉬웠던 시절도 그리 오래가지는 않았다. 1990년대 들면서
추억을 한잔하다홈플러스 앞 사거리는 한비 사거리에서 복산 사거리로 새 이름표를 달았다. 홈플러스 중구점 근처에 한비사택이 있었음을 알 수 있는 흔적은 거의 사라졌다. 오직 한비다방만이 과거를 회상케 하고 있다. 한비다방은 번영로를 물고 있어서 금방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다방에서 커피 한잔하기는 쉽지가 않다. 주변에 주차하기가 마땅하지 않음이 가장 큰 원인이다. '코로나19' 이전에는 인근 울산여중이 운동장 입구 한쪽을 주차장으로 개방했다. 하지만 방역 관계로 외부인들에게는 문을 닫았다. 그러나 다방을 간 날은 운이 좋게 울산
시작하면서2022년 1월 27일은 울산공업센터 지정 60주년 공식 기념일이다. 울산은 1962년 대한민국 최초 특정 공업센터로 지정된 이후 이 나라 경제부흥을 이끌며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산업통상자원부가 지난 1월 27일 오전 10시 30분 울산전시컨벤션센터에서 '울산공업센터지정 60주년' 기념식을 개최했다. 울산으로서는 감개무량한 행사이지만 공업센터지정 50주년 역사를 축하했던 10년 전 행사보다는 규모가 많이 축소됐다. 100년을 반으로 접은 50년 단위보다는 의미가 크지 않다고 보는 것 같다. 미래 100주년 기념식을 기대해야
종로다방에 대한 기억들종로다방은 은행에 돈 빌리러 온 사람들에게도 기억에 남는 공간이다. 조흥은행에 대출 신청해놓고 이 다방에서 기다렸던 건축업자들, 명절 전 어음을 할인하러 온 중소기업 사장들이 기름 냄새 물씬한 작업복을 입은 채 종로다방에서 초조한 표정으로 앉아있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들은 계산대 전화기 벨이 울리면 혹시 '내 전화일까?' 하고 일제히 마담의 입을 쳐다봤다. 그들 중에는 지금 경제적으로 크게 성공해서 떵떵거리며 기업을 경영하는 사장님도 더러 있다. 그들도 가끔 이 거리를 지날 때 과거 안절부절못했던 이 다방에서의
시작하면서7080 청춘들의 아지트였던 다방을 거리에서 찾기가 점차 힘들어진 세상이다. 살림살이가 나아지면서 커피 전문점들이 우후죽순으로 늘어나고 있는 것과 비례해 다방은 역방향으로 고속질주 중이다. 그래서 그런지 길을 가다 다방 간판을 만나면 기분이 좋다. 흡사 모래밭에서 잃어버린 동전을 찾은 느낌이다. 어느 외국인은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발달하게 된 것은 다방문화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단정했다. 커피 한잔을 앞에 두고 이야기하는 모습들이 그들에게는 진지한 토론을 하는 것으로 비쳤을 수도 있다. 우리는 지금 다방을 잊어버리고 있는 시대
추억을 찾아서 걷다겨울 문턱에서 추억 속 예나르다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이 다방은 십수 년째 문을 닫은 상태로 인터넷 게임장 간판이 겨우 과거 흔적으로 남아있다. 실제로 구시가지는 한물간 도심이다. 시장 골목에 있는 예나르다방도 마찬가지다. 근래 중구지역에 대단지 아파트가 입주하면서 기지개를 켤 날을 학수고대하고 있다. 그러나 수십 년째 원도심 전체가 썰렁한데 옥골시장 입구라고 별다를 수야 없겠다는 생각이 든다. 예나르다방은 수년 전에만 해도 계단 입구에 잡아당기는 철문이 고장 난 채 반쯤 내려오다 멈춰 있고 계단에는 주변 상인들
시작하면서12월 중순까지 포근했던 계절이 그래도 한번은 겨울 맛을 보여줘야겠다며 심술을 부렸다. 울산은 요 며칠 평균 영하 8~9도, 체감 온도는 15도까지 곤두박질이다. 지난 초겨울 이글을 손볼 때만 해도 봄날처럼 포근했었다. 하기야 그때도 계절은 아침저녁 심한 온도 차를 보이며 겨울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지만. 어영부영하는 사이에 한파가 몰아치는 계절이 절정이다. 곳곳에 고드름이 주렁주렁하다. 떠나가 버린 가을을 못내 그리워하면서 예나르다방 이야기를 썼다. 지난 11월 중순, 태화강 하류 억새밭은 억새들의 화려한 군무가 절정이었다
매일 발디딜틈 없이 관객들 몰리던 태화극장극장과 다방은 가까이 있을수록 서로 득이 되는 악어와 악어새 같은 관계였다. 유명연예인 쇼와 다양한 지역 문화행사가 열렸던 태화극장과 천도극장 이야기를 잠시 언급하고자 한다. 울산은 1962년 시 승격과 함께 우리나라 최초의 공단지역이 돼 전국에서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 이때 서일교라는 사람이 장인 고기업 씨에게 권유한 것이 영화 사업이었다. 해방 후 서 씨 집안은 대구에서 영화관을 운영해 재미를 봤다. 따라서 서 씨는 울산에 근로자들이 많아지면 영화 사업이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고 이
시작하면서온 듯 만 듯 가을이 가고 겨울이 자리를 잡았다. 11월 들면서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쌀쌀하다. 첫눈도 예년보다 보름이나 일찍 내렸다. 일교차가 10도, 심지어 15를 오르내린다. 감기 환자들로 병·의원이 붐빈다고 한다. 올해는 유난히 계절의 변화가 심하다. 기상이변이라는 말이 실감 난다. 여름 같은 날씨가 이어지다 하루아침에 한파가 몰려오는 상황이다. 농작물 수확을 앞둔 농민들의 걱정이 태산일 것 같다. 모처럼 비가 내려서 더러워진 차를 씻고 닦으려 하다 우중충한 하늘을 쳐다보니 또 비가 올 것 같아서 그냥 타고 다닌다.
이쯤에서 청자다방 분위기를 알 수 있게 필자가 공연을 위해 쓴 연극 대본을 소개한다. 제목은 『청자다방 미스 김』이다. 같은 날 오전 10시, 청자다방 영업 시작.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가 흐른다. 다방 문이 열리면서 무릎 위 한참 올라간 미니스커트를 입은 여자 손님 1, 2, 3이 문이 열리기를 기다렸다는 듯 우르르 몰려든다. 이들은 다방에 들어서자마자 뮤직 박스 앞 탁자로 몰려간다. 이들이 DJ 오빠와 눈길이 마주치자 DJ 오빠는 기다렸다는 듯 조용필의 '돌아와요 부산항에' 후속곡으로 최병걸의 노래 '난 정말 몰랐었네'를
가을이 저문다 싶더니 한파주의경보가 뉴스의 중심에 있다. 기상이변이 이렇게 우리들의 삶을 피곤하게 만든다. 날이 추우니 당연히 거리에서 들어갈 곳을 찾아야 하는데 골목마다 커피점들뿐이다. 그냥 엽차 한잔 마시고 속을 덥힌 후 커피를 마실 수 있는 다방은 없다. 그래서 다방 시절을 기억하는 7080 청춘들에게 편지 한 통을 쓴다. 제목은 '떠나가 버린 옛님께 바침'이다. 나의 그 시절 일기일지도 모른다. 암울했던 시절 보석 같았던 그곳1978년 1월 청운의 꿈을 안고 울산에 왔습니다. 당시 울산은 여기저기 빈 땅에 공장이 지어지던 시